“196번, 197번 들어오세요~.”
성탄절 전날인 지난달 24일 서울 명동성당 옆 옛 계성여중고 운동장. 대형 천막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봉사자가 번호를 외치고 있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작년 1월 개소한 ‘명동밥집’. 노숙인과 홀몸 어르신 등에게 수·금·일요일 오전 11시~오후 4시 점심을 대접하고 있다.
명동밥집 풍경은 ‘일사불란’과 ‘친절’이 특징. 입구에 ‘손님’들이 들어서면 “네 분요!” 하는 외침이 들리고, 그 즉시 식판을 들고 있던 봉사자들이 “네 분 식사요!” 하고 ‘복창’한다. 이어 손님 식탁에 식사가 차려진다. 1인용 식탁 44개 사이로는 리필 카트가 쉴 새 없이 오가며 봉사자들이 먼저 반찬이나 국 더 들겠느냐 묻는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 퇴식 팀이 번개처럼 식판을 치워 가고 이어 소독 팀이 탁자와 의자를 소독하고 새 손님을 맞는다. 손님들은 식판을 들고 기다리는 일 없이 자리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된다. 모든 봉사자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명동밥집이 문을 연 것은 전임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의 의지 덕분. 2020년초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직후 염 추기경은 “이럴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인데,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급식소를 제안했다. 코로나 때문에 기존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던 때였다. 사회사업 활동을 하는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실무를 맡았다. 본부장 김정환 신부는 “재작년 8월 개소 결정 이후 김하종 신부님의 성남 ‘안나의집’을 비롯해 여러 급식소를 견학하고 노숙인 등을 상대로 ‘시장조사’도 하고, 후원자와 봉사자를 모집하고 모의실험까지 거쳐 1월에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이름은 천주교 색깔 다 빼고 그냥 ‘명동밥집’으로 정했다. 운영은 교구에 의지하지 않고 후원으로만 꾸려가기로 했다.
‘명동밥집’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노숙인들은 “우리가 명동성당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밥집을 가려면 명동성당 앞마당을 지나야 하는데, 거북했던 것. 또 명동성당으로선 일요일 미사 때도 배식이 있기 때문에 미사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1년이 지나며 모두 기우(杞憂)임이 밝혀졌다.
시작은 도시락이었다. 팬데믹 상황 때문이었다. SK그룹이 도시락을 후원하면서 대기업과 후원자들의 손길이 이어졌다. 현장 배식은 5월 시작됐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며 노하우가 쌓였다. 2021년 말까지 약 8만명이 식사했다. 자원봉사자도 940명에 이른다.
1년간 많은 변화와 치유가 있었다. “지금은 손님들이 저희에게 먼저 다가와 ‘성탄 무렵 명동성당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처음 봤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식구’가 된 것이지요.” 기초생활수급자 가운데는 1만원, 2만원을 놓고 가는 이도 있다. 아무리 말려도 “이래야 내가 떳떳하다”며 굽히지 않는다. 이제 노숙인들은 명동 거리에서 봉사자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한다고 한다. 봉사자들 역시 “명동밥집 이전엔 명동 거리에 저렇게 많은 어려운 이웃이 있는 줄 몰랐다. 이젠 그들이 눈에 보인다”고 말한다. 봉사자가 후원자를 겸하는 경우도 많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가 찾아와 식사 후 목돈을 놓고 갈 때도 있다. 자신이 낸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직접 확인한 후 즉석에서 더 기부하는 경우다.
‘명동밥집’은 1주년을 맞아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현재도 라파엘클리닉이 의료 지원을 하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면 이미용 봉사와 심리 치료, 놀이 치료 등도 추가 구상하고 있다.
김 신부는 “미사 참여하는 신자들과 식사하는 손님들이 같은 길로 올라와 섞이고 있지만 당초 우려와 달리 아무 문제도 없었다”며 “명동밥집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천주교 본래의 정체성과 정신을 실현하는 현장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