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은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만 이뤄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중기(中期)에 주목할 필요가 있죠. 중년에 접어든 왕조의 대들보가 무너지려 하고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이 출현한 시기였습니다.”

만 84세인 역사학계의 원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연구서 두 권을 동시에 냈다. ‘서경덕과 화담학파’(지식산업사)와 ‘허균 평전’(민속원)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유희경과 침류대학사’까지 조선 중기의 인물 평전 세 권을 잇달아 썼다. 세 책의 키워드는 화담 서경덕(1489~1546)의 학맥이라는 것이다.

‘허균 평전’을 쓴 원로 역사학자 한영우(왼쪽) 교수와 권오창 화백이 2014년 그린 허균의 표준영정. /김연정 객원기자·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왜 화담일까. 한 교수는 “화담은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학계에서 과학에 가까운 자연철학을 논의했던 사람으로, 실학의 비조(鼻祖·어떤 학문을 연 사람)라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은 화담의 수제자였고, 화담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이 아들 허균(1569~1618)으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한 교수의 ‘허균 평전’은 그동안 ‘홍길동전’의 저자로서 국문학계에서 주로 논의됐던 허균을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그는 혁명가이자 실학자였습니다.” 조선 중기 위로부터 나라를 개혁하려 했던 사람이 율곡 이이였다면, 아래로부터 ‘혁명’을 꿈꿨던 인물이 정여립과 허균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지만, 허균은 기업형 농업 경영을 주장하는 ‘치농’과 전국의 식문화를 집약한 ‘도문대작’을 썼다. 실학적인 생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광해군 때 집권 세력인 북인의 일원으로서 중앙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허균에게는 ‘두 얼굴’이 있었다. 본인도 인정했듯 재승박덕(才勝薄德)했다는 것. 재주는 뛰어났으나 성격과 행동이 거칠어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실록에 보이는 그의 행적은 지금 눈으로 보면 비리 공무원의 전형 같다. 고을 수령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을 데려다 먹이고, 친구를 과거 시험에 부당하게 합격시키는가 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공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파직을 숱하게 겪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자신을 위한 축재가 아니라, 서얼 지식인과 승려·기생·화공 같은 소외 계층을 도왔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허균이 광해군 때 왜 역적으로 몰려 죽었는지, 그 진상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실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진짜로 모반, 즉 혁명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유구국(오키나와) 군사를 끌어들였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홍길동전’ 결말에서 주인공이 임금이 되는 곳이 바로 유구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한 교수는 “허균은 좋은 선비들을 배척하는 당쟁, 입만 살아 떠들면서 실무를 모르는 지식인, 전쟁의 참화와 농민의 가난을 외면하는 권력자들을 혐오했다”고 말했다. “백성이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섭다고 경고하기도 했죠.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바로 허균 자신이었습니다. 허균의 가장 큰 죄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