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제주시 한울공원 근처 도로변 ‘박진경 추도비’에 감옥을 상징하는 철창이 설치됐다. 제주 4·3연구소, 제주 민예총,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등 16개 단체가 나섰다. 이들은 “박진경은 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소위 출신에 미군정 지시로 4·3학살을 집행했던 자”라며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추모비를 철창에 가둔다”고 주장했다.
박진경은 1948년 4·3 사건 수습 임무를 맡은 조선경비대(국군 전신) 9연대장이었다. 사건 발생 한 달 만인 1948년 5월 6일 부임한 그는 6월 18일 새벽 남로당 지령을 받은 하사관 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무장 세력과 싸우다 암살당한 지휘관이 ‘학살’ 주동자로 몰려 비난받는 상황이다.
◇尹 당선인 “무고한 희생자 보듬는 것은 자유민주 국가의 의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3일 제주 4·3사건 추념식에 참석, “무고한 희생자들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고 아픔을 나누는 일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했다.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시작된 남로당 무장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노무현 정부 때 나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4·3보고서’)는 4·3사건 희생자를 2만5000명~3만명으로 추산한다.(당시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숫자 1만4028명을 근거로 1만5000~2만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살아남은 제주도민들도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될 때까지 공직 임용이나 기업 취직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윤 당선인이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이나 당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3 추념식에 참석해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고 명예 회복을 약속한 것은 늦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윤 당선인의 추념사에서 빠뜨린 게 있다. 남로당 무장 세력과 맞선 군인과 경찰, 공무원, 우익 인사와 가족들의 희생이다. 요즘은 4·3 희생자라고 하면, 군·경 진압 부대가 가해자로 지목되고 남로당 무장 세력의 살상(殺傷)은 상대적으로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4·3보고서’에 따르면,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1만4028명 중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2.6%인 1764명(보고서 371쪽)이다. 특히 남로당 무장 폭동을 일으킨 초기부터 그해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으로 군의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남로당 무장대의 폭력은 심각했다.
◇남로당 무장대, 열 살·열네 살 소녀 죽창·칼로 처단
남로당 폭동 첫날인 1948년 4월 3일 희생자는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등 12명이다. 북제주군 애월면 구암마을 유지였던 문영백의 딸 열 살 정자, 열네 살 숙자는 죽창과 칼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2권 28쪽) 두 살짜리 아들까지 죽창에 찔렸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화북지서 소속 김장하 순경은 집에서 잠을 자다 아내와 함께 살해당했다. 4월 11일 제주 오라리에선 송원화 순경 아버지 송인규가 살해됐고, 18일 조천에선 경찰관 김성홍의 아버지 김문봉이 희생됐다. 무장대가 경찰, 우익 인사 가족을 해칠 때는 ‘경고’ 의미로 시신을 훼손하기도 했다.
남로당 무장대 폭력이 심각했지만, 제주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위원회)가 2008년 낸 ‘화해와 상생:제주4·3위원회 백서’는 가볍게 다뤘다. ‘백서’는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 내용을 60쪽에 걸쳐 소개하면서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1쪽으로 다룰 만큼 균형을 잃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을 둘러보면 전시 내용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비해 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학살은 너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김상봉 전남대 교수, ‘폭력과 윤리: 4·3을 생각함’179쪽)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남로당 암살자는 의인으로 미화
박진경 9연대장(이후 11연대장) 암살은 4·3사건 성격과 책임을 둘러싸고 가장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박 대령 암살범들은 재판 과정에서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손선호 하사)고 증언했다. 하지만 당시 소대장이던 채명신 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은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4·3 초기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들이 입산했다.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심을 두었다”고 증언했다.’4·3보고서’에 실린 증언이다. 주민들을 남로당 무장 세력과 떼어놓는 선무 작업에 주력했다는 주장이다.
◇남로당, 연대장 부임 닷새 만에 암살 결정
‘4·3보고서’에 등장하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라는 자료가 있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를 사살하면서 획득한 남로당 내부 문서다. ‘투쟁보고서’는 박진경 부임 닷새 만인 5월 10일 ‘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박진경 연대장 작전과 무관하게 암살 지령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KBS제주총국이 작년 4월 2일 내보낸 다큐 ‘암살 1948′은 박 대령을 ‘제주도민을 학살한 강경 토벌작전 주역’으로, 상관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는 ‘의인’(義人)으로 묘사해 논란을 빚었다.
◇박진경 재임 중 무장대 사살 최대 25명
‘4·3보고서’ 주요 필진이 포함된 제민일보 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 3권에는 ‘4·3사건 일지’가 실려있다. 박 연대장 재임 기간 일지를 분석했더니, 경비대의 무장대 사살은 14명이었고, 경찰과의 합동 토벌 작전까지 더해도 25명이었다. ‘4·3보고서’에 참여했다가 사퇴한 나종삼(80) 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은 “박진경 연대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얘기는 완전히 날조”라면서 “박 연대장을 학살범으로 모는 배후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운 미 군정에 4·3사건 책임을 돌리는 남로당 사관(史觀)이 있다”고 했다.
◇제주도당 무장 총책 김달삼 “스딸린 대원수 만세!”
남로당 무장 폭동의 의도는 제주도당 무장 총책 김달삼의 이후 행적을 봐도 알 수 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그는 4·3 사건의 의미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 투쟁의 일환”이라고 한 뒤,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쓰딸린 대원수 만세!”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6·25전쟁 당시 노획한 북한 정부 문서로 드러난 사실이다.
‘4·3위원회’ 위원을 지낸 한광덕(81) 예비역 육군소장은 “윤 당선자가 무장 폭동을 일으킨 남로당의 책임을 묻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애쓰다 목숨 바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의 희생에 침묵한 것은 국민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創軍 주역이 조롱당하는데 왜 모르는 체하나]
故박진경 대령 양손자, 박철균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이렇게 모욕당하는 걸 보면서 까마득한 군(軍) 후배로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박철균(59) 국방부(예비역 준장) 군비통제검증단장은 1948년 4·3사건 당시 제주 주둔 9연대장을 지낸 박진경(1918~1948) 대령의 양손자다. 박 대령은 연대장 부임 43일 만인 1948년 6월 18일 남로당 지령을 받은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박 대령은 후손을 남기지못해 조카인 박단장 아버지(박익주, 예비역준장, 전 국회의원)가 집안 결정에 따라 양자로 들어갔다.
유럽 출장 중인 그는 6일 통화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4·3 추념사에 대해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고통받은 희생자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하지만 윤 당선인이 군경의 희생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서운하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무장 폭동의 책임을 지적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임무를 수행한 군인·경찰의 희생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어렵다”고 말했다.
ㅡ일부에서 박진경 대령을 제주도민 학살 주동자라고 한다.
“좌파의 선동이 지나치다. 할아버지 재임 기간 작전 통계를 봤더니, 그렇지 않았다. 채명신 장군을 비롯한 당시 증언도 할아버지가 선무 공작에 힘썼다고 했다.”
ㅡ박 대령 암살범을 의인으로 묘사한 KBS 다큐까지 나왔다.
“할아버지 보기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없다. 육군장(葬) 1호로 장례 치른 분을 그렇게까지 모독할 수가 있나. KBS에 대해선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
ㅡ창군 주역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임무를 띠고 간 박 대령이 학살범으로 몰려도 정부는 말이 없다.
“정부가 대한민국 탄생을 위해 목숨 바친 군인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모르는 체하고 이렇게 침묵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