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인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강원도의 한 부대에서 지프차 위에 선 채 장병들을 격려하는 즉석 연설을 하고 있다. /기파랑

“아직도 어떤 나라들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철저히 깨닫지 못해서, 원수가 저의 국경을 침범할 때까지는 싸우기를 싫어하는 까닭에 많은 우려가 되는 것이니, 합하면 살고 합하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이치를 확신할 때까지는 안전을 보장키 어려울 것입니다.”(1951년 8월 15일 대통령 광복절 기념사)

팔순에 가까운 한국의 노(老)대통령은 한겨울 서울운동장과 최전방 부대의 지프차를 가리지 않고 전시(戰時) 연설을 펼쳤다. 한반도 전역에서 종횡무진으로 한국어와 영어 연설을 했다.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의 수석 고문이었던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는, 청년 시절부터 배재학당과 만민공동회에서 연설 경험을 쌓은 이승만이 “수사학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은 “대통령의 연설로 사단의 사기가 고무돼 새로운 각오로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연세대 대학원 박사 과정 김민식씨와 함께 ‘한국정치학회보’ 봄호에 논문 ‘전쟁과 연설: 6·25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일의 6·25전쟁 동안 모두 279회 이상 연설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흘에 한 번꼴로 연설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6·25 전시 연설

논문은 “지금까지 학계는 전쟁 발발 이틀 후 대전으로 피신한 뒤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녹음한 방송 연설 하나만 비판했을 뿐 나머지 278회의 연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전 방송에선 일각의 주장처럼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안심하라’는 허위 내용은 없었으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위해선 국민의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당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51년 7월까지 이어진 전면전쟁기에 100회가 넘는 연설을 했다. “한반도의 전쟁은 단순한 내란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국제전” “세계의 문명과 정의의 생명을 높이기 위한 전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했다. 국군과 이북 주민을 포함한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도 힘썼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절박한 상황에서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격전지 영천을 시찰하며 연설한 이승만에 대해 올리버는 “부산 인근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점령당했을 때 국민을 결집시켰다”고 평가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이승만은 “독립자유권을 가지고 있으니 누구나 우리 국권에 대해 간섭하지 못할 것”이라며 38선 이북 지역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이 있음을 천명했다. 1950년 10월 29일 평양 연설에서는 “대한민국은 자유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안전 우려에도 군중 속으로 들어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명섭 교수

1951년 7월 이후 정전 논의가 본격화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군이 최소한 일본 군대와 동등한 수준으로 충분히 증강돼야 한다”며 “우리에게 총을 한 자루 줌으로써 (미국인의) 아들을 한 명 살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김명섭 교수는 본지 통화에서 “이승만은 북한군과 중공군이 북쪽에 건재한 상황에서 충분한 안전 보장 없이 정전이 이뤄질 경우 다시 무력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의 이 같은 외교적 노력과 반공포로 석방 등 압박책은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공통점이 있는데, 국민 통합과 국제적 지원을 위해 적극적인 전시 연설로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을 보인 것”이라며 “젤렌스키와 달리 인터넷을 지니지 못했던 이승만에겐 영어를 더 잘했다는 강점이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