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 배 주교는 "40대때는 가수 현철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마산교구 제공
천주교 마산교구장 배기현 주교. 배 주교는 "40대때는 가수 현철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마산교구 제공

“도로 푸라(피워라)!”

1998년, 아버지의 한마디에 배기현 신부(현 마산교구장)는 금연에 또 실패했다.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담배는 그냥 끊는 것”이란 충고를 듣고 온갖 금단현상을 무릅쓰고 시도한 금연. 석달쯤 됐을 때 아버지가 불렀다. “니 담배 끊었다면서?” “예” “니가 신부 된 것만 해도 가슴 아픈데 신부가 담배꺼지 끊고 어찌 살끼라고, 도로 푸라!” 그 자리에서 신부 부자(父子)는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면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이다.

천주교 마산교구장 배기현(69) 콘스탄틴 주교가 생애 첫 책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생활성서사)을 펴냈다. 37편의 에세이와 교구장으로서 발표한 글을 모았는데 ‘주교의 책’이란 선입견을 싹 날려버린다. 엄숙함 대신에 솔직·소탈함과 유머가 가득하다.

배기현 주교 저서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의 표지와 뒷면. 뒷면은 어머니가 1996년 성탄절에 보내온 카드. 배 주교는 표지 디자인과 본문 구성까지 모두 자신이 직접 정했다며 "수익금은 출판사가 알아서 좋은 곳에 써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생활성서사
배기현 주교 저서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의 표지와 뒷면. 뒷면은 어머니가 1996년 성탄절에 보내온 카드. 배 주교는 표지 디자인과 본문 구성까지 모두 자신이 직접 정했다며 "수익금은 출판사가 알아서 좋은 곳에 써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생활성서사

항상 ‘커서 뭐가 되겠노?’라는 걱정을 달고 산 악동 시절, 고교 중퇴 직전까지 돌진한 질풍노도 사춘기, 사제가 되고나서도 끊임없이 ‘이 길이 맞나’를 회의하는 신부. 첫 부임지에선 ‘병자성사’를 갔다가 병든 소를 살려준 이야기, 주교가 된 후에도 노인들과 함께 성당 구석에서 함께 담배 피우며 애환을 들어주고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인 일화, ‘(너무 맛있어서) 혓바닥은 봤다 카고, 목구멍은 못 봤다 카고’ 등 마산 사투리 속담까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슬며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러나 그 유머와 해학의 외피(外皮) 속에는 자신에게 완전히 의탁한 알코올중독자 친구를 보면서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나’하며 부끄러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곧 영성(靈性)’이라는 배 주교의 마음이 녹아있다.

지난주 전화 인터뷰에서 배 주교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분들의 ‘기다림’과 ‘기도’였다”고 말했다. 대입 재수할 때까지 한 번도 사제가 될 생각을 하지 않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성소(聖召)’를 느낀 것도, 사제 생활의 수많은 고비를 넘긴 것도 ‘그만둬도 나는 괜찮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기다려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는 것.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신부 무끼(감)가 아닌 제가 신부가 된 것도 그런데 하물며 막판에 주교까지... 이건 아닌데 싶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있다.” 책엔 “하느님이 불량품인 나를 창조한 책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직속 명단에 입적시키신 것”이라며 “내가 괜찮은 총각이었다면 왜 진작 우리 동네 어른들이 다투어 나를 사위 삼지 않았겠는가”라고 적기도 했다. 그렇게 그윽하게 사랑하며 기다려준 분들 덕분에 ‘좀 까불어도 울타리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책을 낸 이유도 ‘세상에 웃음과 따뜻함을 선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상에 웃을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신부들까지 어려운 표정 짓고 있으면 우째 삽니까. 마음 열어주고, 불 때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담배도 지난 여름 끊었다고 했다. “코로나는 깊어가고, 국민들은 고통받고, 민심은 갈라지고... 주교로서 보여줄 게 하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뭔가 바쳐야겠다’ 생각하고 저로서는 가장 힘든 것, 담배를 끊기로 했지요. 다행히 아직은 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