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의 ‘삼일포’(위)는 벌레가 파먹은 자국이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한 풍경을 만들었고, 보존 처리 과정에서도 그 흔적을 남겨 뒀다. 신사임당의 ‘포도’(아래 왼쪽)는 5만원권 앞면에 실린 그림의 원본이다. /간송미술관

금강산을 흘러나온 신계천이 36개 봉우리에 가로막혀 그림 같은 정경을 이루는 호수가 삼일포(三日浦)다.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1707~1769)은 이곳을 푸른빛을 띤 선경(仙境)처럼 그린 작품 ‘삼일포’를 남겼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은 ‘호수 위로 눈이 내리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전체에 가득한 하얗고 둥근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이상하다. 점들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벌레가 갉아 먹은 자국이었다. 최근 이 그림의 보존 처리 과정에선 고민 끝에 결손부를 메우는 작업을 하면서도 완전히 새로 칠하지는 않고 눈 내리는 듯한 흔적을 일부 남겨 뒀다. ‘그 자국이 오히려 그림의 서정적인 흥취를 살렸다’는 얘기다.

‘삼일포’를 포함한 고미술 명품 32점이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보화각에서 전시된다. 6월 5일까지 열리는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전(展)이다.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7년 만의 전시이자 보화각 보수 정비 전 마지막 전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한 문화재를 바탕으로 1938년 개관한 간송미술관은 유물 1만6000여 점을 소장한 국내 대표적인 사립 미술관이지만,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특별전에만 문을 열어 ‘은둔의 미술관’으로 불렸다. 2015년부터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협력 전시, 코로나19와 수장고 신축 공사로 인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이번 전시는 2층 규모 보화각 전시실 중 1층만 문을 열어 양적으로는 소규모지만, 질적으로는 수준 높은 명품들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근 2년 동안 문화재청의 ‘문화재 다량소장처 보존관리 지원사업’을 통해 보존 처리된 작품들이다.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심사정의 ‘삼일포’와 조선 전기 작품인 안견의 ‘추림촌거’, 강희안의 ‘청산모우’ 등 30점이 수록된 ‘해동명화집’이다. 함께 수록된 신사임당의 ‘포도’는 안정된 구도 속 부드러운 필치로 먹을 짙고 옅게 쓰는 방법을 통해 포도알의 생동감을 표현했다. 5만원 지폐 앞면에 신사임당의 초상과 함께 실린 그림은 이 작품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른 그림도 지정문화재에 버금간다고 할 만한 작품들이다. 17세기 화가 한시각의 ‘포대화상’은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그렸다가 나중에 돌아온 작품이다.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는 신선의 복숭아를 훔쳐 먹었다는 중국의 동방삭을 평범한 조선 사람의 얼굴로 그렸다. 소나무 아래 신선을 그린 ‘송하녹선’은 장승업의 말년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최근 소장 국보의 경매 출품 파문을 딛고 미술관을 정상화하려는 간송 측의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지난 15일 간담회에서 “국보 ‘금동삼존불감’은 구입자로부터 지분 51%를 기증받았고 전시 운영에 아무 문제 없는 상태”라며 “두 번 다시 소장 유물을 경매에 내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 대구 간송미술관이 착공됐고, 지난달엔 보화각 옆 새 수장고가 완공됐다. 무료 전시인 ‘보화수보’전은 홈페이지(www.kansong.org)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