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8년 전의 일입니다. 2004년 1월, 조선일보 문화부 막내 기자였던 저는 한 고서상으로부터 제보를 받았습니다.
“미국 책 한 권을 입수했는데요, 태극기가 실려 있어요.”
미국 해군부(Navy Department)가 발간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책이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의 국기가 컬러로 실려 있었고, 그중 조선(Corea)의 국기로서 태극기가 소개돼 있었습니다. 괘의 좌우가 바뀌긴 했지만 태극과 4괘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현재의 태극기와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무심히 책을 훑어봐선 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죠.
그런데 책의 서문을 보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3000부를 제작, 각 기관에 분배하기로 1882년 7월 19일 상원에서 결의했다.’
이 기록이 왜 놀라운 일이었느냐면, 지금까지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1882년 8~9월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1861~1939)였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영효의 ‘사화기략’에는 태극기를 만든 것이 1882년 9월 25일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달 이상 이른 7월 19일에 이미 미국에선 ‘태극과 4괘로 이뤄진 조선 국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영효가 만들었다는 ‘태극기’보다 최소한 2~3개월 앞서 조선 국기인 태극기가 존재했다는 것이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현 명예교수, 훗날 국사편찬위원장)에게 물어봤습니다. 자료를 본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것은... 김원모 선생 말씀이 맞는다는 것이 되는데!”
무슨 얘길까요.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중요한 행사가 거행됐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수교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었죠. 이때 미국 성조기와 나란히 조선의 국기가 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근대사의 자료라는 게 묘한 데가 있어서, 이보다 11년 전에 발생한 신미양요는 꽤 많은 자료 사진이 남아있습니다만 정작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의 사진은 전혀 현존하는 것이 없습니다. 분명 누군가 사진을 촬영했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게양됐던 ‘조선 국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죠. 그런데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바로 이 국기가 태극기의 원형이었다고 보고 있었던 겁니다.
김원모 교수를 만나 자료를 보여줬더니 몹시 놀라워하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미국 측 전권대사는 해군 제독 로버트 슈펠트(Shufeldt·1822~1895)였습니다. 그런데...”
김 교수가 발굴한 슈펠트의 ‘조선 개항 체결사’에는 이런 내용이 수록돼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에서 특사로 파견한 마건충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며 조선 측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게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슈펠트는 이것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조선의 국기를 제정해서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슈펠트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1832~?)에게 ‘국기를 그리라’고 지시했고, 이응준은 미 군함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습니다. 국기를 만든 것은 1882년 5월 14일과 22일 사이였고, 이 국기는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서 게양됐습니다. 그해 7월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은 태극기는 바로 이때 내걸린 조선 국기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영효 태극기’보다 4개월 앞선 것이 됩니다. 괘의 좌우가 바뀐 것에 대해선 “반대편에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회사로 돌아와 이걸 기사화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퇴사한 L선배가 지나가다 웃으며 제게 물었습니다.
“유(兪)공, 다음주 기삿거리는 뭐가 있나?”
저는 저도 모르게 최대한 일상적인 말투로 대답했습니다.
“아 네... 최초의 태극기가 발견됐습니다.”
그걸 들은 L선배의 황당한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박영효 이전 최초의 태극기가 발견됐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2004년 1월 27일자 사회면과 문화면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태극기의 기원과 관련한 연구가 진척됐습니다. 대체로 ‘태극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역관 이응준이었고,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를 모본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공인되도록 했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가 과연 ‘이응준 태극기’가 맞는지에 대한 연결고리가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 ‘빠진 단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2018년 8월이었습니다.
이태진 교수가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 ‘슈펠트 문서 박스’ 속 ‘한국 조약 항목’에서 태극기 그림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 도안과 동일한 모양이었습니다. 책에서 태극기 위에 ‘COREA’, 아래에 ‘Ensign(깃발)’이라 적힌 것까지 똑같았는데, 여기선 손으로 쓴 글씨였습니다. 즉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의 원본이었던 것입니다. 이 태극기 그림에 날짜가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문서가 1882년 6월 11일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슈펠트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다시 조선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저는 속으로 이런 외마디 말을 외쳤습니다. “만세!”
그리고 이 사실 역시 제가 특종 보도했습니다.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가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게양됐던 ‘이응준 태극기’란 사실이 확실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극기를 만든 사람은 박영효(1882.9)가 아니라 이응준(1882.5)이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많은 백과사전의 서술이 바뀌었습니다. ‘태극기를 만든 사람’ 또는 ‘태극기의 창안자’가 종래의 박영효에서 이응준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러면 이응준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기록이 많지 않은데, 1850년 증광시 역과에 2위로 합격한 뒤 역관이 된 뒤 중국어 통역 일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1882년 조미조약 때는 영어를 아는 청나라 역관을 통해 미국과의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제가 찾아낸 조금 묘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종실록’에는 1889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간 이응준이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를 고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중국 북양군벌의 실력자이자 당시 조선을 쥐락펴락하던 원세개(위안스카이)였습니다. 그는 “이응준이 왕을 속이고 2만금을 가로챘다”고 했습니다. 전후 사정을 보면 이응준이 청나라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라는 밀명을 받은 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횡령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각에선 ‘청나라 깃발을 국기로 쓰라는 권유를 무시당했던 청나라가 조선 국기를 창안한 이응준을 눈엣가시로 봤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이후 이응준이 어떻게 됐는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임금의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죄로 벌을 받고 하루아침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종 때 장영실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이후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오래도록 알려진 사람은 중인 출신의 일개 역관인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부마였던 ‘금릉위’ 박영효였습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지만 훗날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을 맡는 등 친일 활동을 했습니다. 태극기의 진짜 창안자였던 이응준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선 무척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7일까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을 열고 ‘가장 오래된 태극기’ 2점을 전시한다고 합니다. 이태진 교수가 ‘슈펠트 문서’에서 찾아낸 태극기와 1882년 7월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입니다. 14년 전 그 태극기를 처음 보도했던 기자의 입장에서 감회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