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여 년의 온갖 풍상 속에서도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면 알겠지만, 기술은 형편없이 퇴보했어. 신라 때에 비해서.”

대학 시절 사학과 답사 때였습니다. 높이 18m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우러러보며 그 위엄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인솔 교수는 혀를 차며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때론 학술적 논리가 예술적 감흥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습니다. 충남 논산시 관촉동의 대형 석불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에서였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이 화강암 석불은 그 위풍당당함으로 인해 예로부터 유명한 불상입니다. 별칭이 ‘은진미륵(恩津彌勒)’인데, 그건 관촉사가 있는 충남 논산시 관촉동 일대가 과거 은진면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초인 서기 968년(광종 19년) 국가의 지원 아래 조각장인이었던 승려 혜명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은진미륵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쥐의 사위 고르기’라는 설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생쥐 부부가 늘그막에 얻은 딸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해님을 찾아갔더니 ‘나를 가로막는 구름이 더 세다’고 했고, 구름은 ‘나를 날려보내는 바람이 더 낫다’고 했다. 바람을 찾아갔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꼼짝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은진미륵이다.”

이 설화는 생쥐 부부가 은진미륵으로부터 “내가 아무리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도 내 밑을 생쥐가 파먹으면 난 쓰러지고 만다”는 말을 듣고 듬직한 생쥐 청년을 사위로 고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비슷한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선 ‘은진미륵’ 대신 ‘담벼락’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은진미륵이 얼마나 유명하면 해, 구름, 바람 같은 보편적인 존재들과 동급에 올랐던 것일까요.

그런데 2018년 2월에 흥미로운 뉴스가 나왔습니다. ‘은진미륵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어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의외라는 걸 알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뭐야, 그 유명한 불상이 아직도 국보가 아니었단 말인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그렇습니다. 은진미륵은 보물로 지정된 뒤 무려 55년 동안 국보 승격 결정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건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문화재청은 당시 ‘일차적으로 소유자인 관촉사가 그 동안 국보 승격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지극히 공무원스러운 해명을 했지만, 앞서 말한 ‘기술의 퇴보’란 시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대체로 은진미륵에 대한 미술사적인 평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머리와 손이 지나치게 크고 몸체는 둔중하다. 원통형 보관은 머리 길이보다 훨씬 길다. 인체 비례가 전혀 맞지 않는다. 3~4등신도 안 돼 보이지 않나?

-얼굴이 널찍하고 편평한데다 토속적인 얼굴이어서 실소가 나온다. 눈 코 입이 왜 저렇게 크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의 정교하고 세련된 불상들과 비교해 봐라. 고려시대 들어 조형미와 제작 기술이 발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불상이다.

다들 그렇게 여긴 분위기에서 이 불상에 대한 ‘미술사적 긴장감’ 같은 건 없이 그저 신앙이나 관광의 대상으로 관촉사에 들러 마음 편히 접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관촉사 은진미륵과 석등·석탑.

세월이 흐르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대체로 이런 얘기였죠.

-정교한 신라 불상이라고? 예전에는 통일신라의 석굴암을 가지고 불상의 미적 기준을 삼았는데, 과연 그것이 모든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것인가?

-정제미와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신라 때의 미감(美感)이었다면, 그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은진미륵은 ‘파격과 대범’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미감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파격과 대범이라고요? 그것은 고려 초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던 호족들의 기상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디테일에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는 대신에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새로운 사조라는 얘깁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런 얘길 했습니다. “은진미륵은 민간신앙에 남아 있던 장승의 이미지를 불교적으로 번안한 듯한 토속성이 보인다. 기적을 일으킬 만한 괴력의 소유자 같은 모습으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 역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불교 미술 전문가인 배재호 용인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라 때는 돌 하나로 불상 하나를 만들었지만, 은진미륵은 큰 돌 세 개로 거대한 불상을 쌓아올렸다. 이것은 당시로선 아주 새롭고 아방가르드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배 교수가 인상적인 얘기를 하나 했습니다.

“은진미륵 맨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시면요.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들어올려진 듯 상당히 정교하게 표현됐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하, 그렇다면 투박해 보이는 은진미륵의 기법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고, 제작자는 사실 그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맨 아래 옷자락 부분은 ‘나는 이렇게 만들 수도 있었단 말이다’라는 걸 보여주는 일종의 인증 표현을 슬쩍 넣은 것이고요. 이건 마치 수십년 전 순정만화나 명랑만화를 그리던 만화가들이 가끔 어떤 컷에 돌연 주인공이 대단히 사실적인 극화체 얼굴로 울부짖는 모습을 삽입하곤 하던 일을 연상케 합니다.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유물이 지나온 시간을 만지며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큐레이터의 땀과 열정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최선주 관장 제공

은진미륵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최근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저서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에서 주목할 만한 주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불상 머리의 보관(寶冠)에 주목한 그는 “고려 4대 임금 광종이 옛 후백제 땅에 제왕의 권위를 세우고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종 때 호족 숙청의 피바람이 불었던 걸 생각하면 이 주장은 좀 오싹하기도 합니다.

최 관장은 2013년 은진미륵을 직접 조사하면서, 색칠한 줄로만 알았던 불상의 눈동자가 검은 색 점판암을 정교하게 조각해 끼워 넣은 것임을 알고 나서 ‘심장이 터질 듯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문화유산은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게 없습니다. 반세기 만에 재평가의 반전을 맞은 못난이 불상을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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