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 기사는 여기서
<지난 줄거리>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는 학계의 최신 주장을 접한 유석재 기자는 부암동 연구실로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를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한글소설의 발전 단계상 허균(1569~1618)이 살았던 16세기 후반~17세기 초엔 도저히 한글로 쓴 소설이 출현할 수 없었고,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는 주장은 경성제대의 한국학자였던 일본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에게서 시작됐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그런데 다카하시 주장의 근거를 찾아보니 ‘허균이 홍길동전을 썼다’는 기록의 존재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런 기록이 있다고요? 그러면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 질문에 이윤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신 이식(李植)이 1674년(현종 15년)에 쓴 문집 ‘택당집(澤堂集)’에 그 얘기가 나옵니다.”
이식은 허균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기록입니다. 그 내용이란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수호전을 본떴다는 것은 종래 악인으로 여겨졌던 도둑을 의로운 인물인 것처럼 그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택당집’의 이 기록 어디에도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로 쓰여진 작품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그저 한문으로 쓴 글로 봐야겠죠. 그리고 허균의 이 글은 지금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글 ‘홍길동전’의 원전이 바로 허균이 한문으로 쓴 ‘홍길동전’이라면 얘기는 많이 달라집니다.
이윤석 교수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뒤, 이윤석 교수가 제보 하나를 받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 황일호(1588~1641)가 쓴 ‘지소선생문집’에 ‘노혁전’이라는 간략한 글이 실려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홍길동의 간략한 전기였습니다.
‘노혁전’의 줄거리는 이랬습니다. 명망가 출신이지만 비천한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홍길동은 사람은 죽이지 않고 재물만 빼앗는 도적이 됐는데, 관아에 잡히지 않고 40년 동안 도적을 이끌다 깨달은 바가 있어 무리를 해산시키고 착해져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는 얘깁니다.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다가 마침내 의금부에 체포된 연산군 때 실제 홍길동과는 큰 거리가 있는 스토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형이 아니었겠는가. 서자 출신, 의적(義賊), 신출귀몰, 도적을 그만둔 뒤 천수를 누리는 해피엔딩 같은 점에서 분명 한글소설의 원형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허균은 한글소설 ‘홍길동전’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죠. 황일호가 이 이야기를 전라감사 종사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시점은 1626년(인조 4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사망한 해는 1618년(광해군 10년). 황일호가 ‘노혁전’ 속의 홍길동 스토리를 들은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8년 전에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수호전 스타일로, 그러니까 홍길동이 ‘의로운 도적’인 것처럼 썼다는 얘기가 됩니다.
순서대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허균의 한문소설 ‘홍길동전’(1618년 이전)→’노혁전’(1626년)→한글소설 ‘홍길동전’(1692년 이후)
여전히 허균의 ‘홍길동전’이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형일 가능성을 굳이 부인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윤석 교수는 인터뷰 중 “다카하시 도루의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이라는 학설은 그의 조선인 제자들에 의해 ‘허균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썼다’는 설로 발전됐고, 특정 제자에 의해서 더 의미가 더해지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제자란 바로 김태준(1905~1949)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또 간단치 않습니다. 경성제대 문과를 나온 국문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태준은 1931년 이희승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했고, ‘조선한문학사’ ‘조선소설사’ ‘조선가요집성’을 저술해 국문학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간송 전형필이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훈민정음’ 해례본을 입수할 때 중개 역할을 맡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한 공산주의자였고, 남로당 간부였으며, 1949년 11월 이주하·김삼룡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김태준이 1933년에 쓴 ‘조선소설사’에서 ‘홍길동전’에 의미를 부여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홍길동전’ 안에는 계급 타파, 적서(嫡庶) 차별의 폐지, 빈민 구제, 새로운 사회(율도국) 건설이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허균의 ‘사회혁명적인 소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는지 이제 와서 따져 보자니 상당히 좌파적인 해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윤석 교수는 이런 해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김태준의 해석을 1990년대까지도 우리 국문학계에서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왜냐고요? 반역죄로 사형을 당한 허균이 세상을 뒤집는 책을 저술했다고 믿고 싶은 게 있었고, 한글소설의 시작을 200년이나 올리려는 애국적인 연구 태도 역시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품에 그런 사회혁명적인 요소가 있다는 건 오해라는 겁니까?”
이 교수가 설명했습니다. “서민들이 읽는 대중서였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서 적서 차별은 어디까지나 양반 사회 내의 문제일 뿐이었어요. 캐릭터적인 설정에 불과했죠. 율도국 이야기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재미를 위한 액션 신 정도로 봐야 해요.”
율도국 군담이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홍길동전’의 후반부를 보면 과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 이건 우리 고전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흥부전’에선 뒷부분 놀부가 박 타는 이야기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데. ‘가루지기전’에선 이미 죽은 변강쇠를 장사지내는 이야기가 그렇고, ‘적벽가’에선 조조가 적벽에서 패한 뒤 도망가는 얘기가 또 그렇게 사정없이 늘어집니다.
이건 무슨 얘긴가? ‘원전’은 결코 그렇게 뒷이야기가 엿가락처럼 늘어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원전’에선 적서 차별이나 율도국 건설 문제가 소설적 설정이 아니라 정말 절박한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원전’이 허균이 쓴 것이라면요.
그런데 몇 달 전에 또 한 연구서가 나왔습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상당히 중요한 정치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계에 편중돼 있었습니다. 비로소 역사학계에서 ‘허균 평전’이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대표적인 원로 한국사학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입니다.
광해군 때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영우 교수는 다르게 봅니다. “실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허균은 실제로 반역을 준비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허균이 유구국(오키나와) 군사를 끌어들여 섬에 숨겨놓았다’는 당시의 기록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홍길동전’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무리를 이끌고 떠나 율도국을 세우는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기 때문입니다.
한 교수는 “허균은 혁명가이자 실학자였다”고 말합니다. 성리학 일변도인 조선 학계에서 과학에 가까운 자연철학을 논의했던 사상계의 독특한 인물이 화담 서경덕(1489~1546)이었고,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의 수제자였으며, 화담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은 바로 그 아들 허균에게로 계승됐다는 것입니다.
조선 중기, 위에서부터 나라를 개혁하려 했던 사람이 율곡 이이였다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꿈꾼 사람은 정여립과 허균이었다는 것입니다. 허균은 기업형 농업 경영을 주장하는 ‘치농’, 전국의 식문화를 집약해 21세기의 백종원도 ‘책에 적힌 레시피대로 따라해봤더니 맛있더라’며 찬사를 보내는 문제작 ‘도문대작’을 썼습니다.
그저 학자가 아니라, 광해군 때는 집권 세력인 북인의 주요 인물로서 중앙 정치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서얼 지식인과 승려, 기생, 화공 같은 예술가와 소외 계층과 친밀했고, 이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공금을 빼돌리기까지 하다가 숱한 파직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한영우 교수는 “허균은 이런 것들을 혐오했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선비들을 배척하는 당쟁, 입만 살아 떠들면서 실무를 모르는 지식인, 그리고 전쟁의 참화와 농민의 가난을 외면하는 권력자들이었죠. 그는 ‘백성이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섭다’고 경고했습니다.”
앞서 김태준이 해석한 ‘홍길동전’의 주요 요소가 무엇이었습니까? 계급 타파, 적서 차별의 폐지, 빈민 구제, 새로운 사회의 건설. 그리고 율도국. 이것들은 허균의 실제 삶과 너무나 닮아 있었던 것입니다. 한영우 교수는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홍길동전 속의 홍길동은 바로 허균 자신이었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다.”
그는 허균의 반역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허균은 권력을 잡아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일신의 부귀영화를 꿈꾸었는가? 아니면 자신이 꿈꾸어 왔던 이상국가를 세우려고 했던가? 그가 정도전을 마음속으로 흠모한 것, 서경덕이나 율곡 같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학자들을 숭앙한 것, 평생 불우한 서얼들을 친구로 삼고 심복으로 키워왔던 것, 그리고 ‘홍길동전’을 쓴 것을 본다면, 서얼이나 소외된 백성들이 좀더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는 평등한 이상국가에 대한 청사진을 실현하려고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한영우 ‘허균 평전’, p.183)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1)현재 전해지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으로 보기는 무리다. (2)그러나 허균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아마도 한문으로 썼을) ‘홍길동전’을 썼다. (3)허균의 ‘홍길동전’은 현전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4)그리고 그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은 실제 인물 홍길동이 아니라, 바로 허균 자신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글쎄요, 그저 ‘성리학과 선비의 시대였던 우리의 조선왕조에서도 이렇게 세상을 앞서나가 혁명을 꿈꾸며 세상을 뒤집으려 했던 지식인이 존재했다’는 걸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것이겠지요. 한때 어떤 의미에서든 세상을 한번 뒤집어 볼 꿈을 꿔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 혁명의 흔적은 훗날 대중의 재미를 위해 대폭 윤색된 한글소설에서조차 차마 모두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는 것이며, 또한 그 이름은 현재 전국의 숱한 관공서와 은행의 서류 견본에 여전히 쓰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