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 5일째인 31일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 전쟁의 묘사는 과연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와 부합하는 것일까? 따져본 결과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승리였다는 설정은 맞지만, 거북선의 모습엔 영화적 상상력이 동원됐고 일본군 측의 전략에도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았다.
①한산대첩은 정말 ‘압도적인 승리’였나?(○)
3차 출정에 나선 이순신 함대가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둔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군에 ‘해전 금지’ 명령을 내렸고 일본의 수륙 병진(竝進·함께 공격함) 전략이 좌절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전선 73척 중에서 59척이 격파됐고, 14척만 간신히 도주했다. 다만 한산대첩 직후 이순신(박해일)은 안골포 전투에 이어 곧바로 적의 본진인 부산까지 공격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부산포 전투는 4차 출정 중인 9월 1일 이뤄졌다.
②거북선은 영화에 나온 것과 같은 구조였나?(×)
1592년 당시 거북선의 규모는 높이 5m, 길이 35m 이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에선 이것보다 훨씬 크게 등장한다. 이 정도 크기의 거북선이라면 18세기에 가서야 제작됐을 것이다. 실제 한산대첩에 동원됐던 거북선은 2척이었으나 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등장하는 신형 거북선의 새로운 구조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다. 조선 전선들의 속도와 화포의 위력 또한 실제보다는 과장됐다. 선체를 충돌시켜 적선을 부수는 충파(衝破) 전법을 실제로 구사했는지에 대해선 전문가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③학익진은 ‘바다 위의 성’이었나?(△)
영화는 한산대첩 당시 조선 수군이 학익진(鶴翼陣·학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을 펼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이를 여러 차례 ‘바다 위의 성(城)’인 것으로 언급했다. 이 말의 출처는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위에 판옥을 설치하고 방패를 든 병사 100여 명이 둘러 있어 작은 성과도 같았다’는 ‘증보문헌비고’ 속 이항복의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모든 전선이 성처럼 움직이지 않는 진을 유지한 뒤 적을 일거에 포격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학익진으로 적선을 포위한 뒤에는 돌진해서 싸웠다는 것이다.
④와키자카는 이순신을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협공하려 했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변요한)를 실제보다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는 평이다. 영화는 와키자카가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협상을 벌여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협공하려 했고, 조선군이 웅치 전투에서 이를 저지하려 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웅치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성 침공을 막으려 싸운 것이었고, 고바야카와는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공격하려 한 적이 없다. 견내량에서 유인책에 좀처럼 말려들지 않는 영화 속 묘사와는 달리 와키자카는 조선 수군을 얕보고 곧바로 추격에 나선 뒤 대패했다. 당시 일본 수군이 화포를 사용하고 철갑선을 동원했다는 설정 역시 가공이다.
⑤한산대첩은 일본군의 명나라 상륙을 저지했나?(△)
영화는 와키자카가 도요토미의 밀명을 받고 한산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한 뒤 명나라로 진격해 천진(톈진)에 상륙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과 다르다. 당시 와키자카 함대에 탔던 5000명 정도의 병력으론 이런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한산대첩을 평가하면서 “요동과 천진 같은 곳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원군이 육로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싸움의 공”이라고 했다. 이 때 조선 수군이 패했더라면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 한반도를 넘어서서 명나라까지 닿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순)=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난중일기),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이순신학과 교수(해전사), 홍순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고선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