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명량’(2014) 이후 8년 만에 나온 프리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흥행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영화관 분위기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기쁩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1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영화 ‘한산’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고증하는 기사를 썼습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8/01/4FSPUPSVM5DVFFP5I3TK26QXFM/)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실제와 다른 점을 짚은 것은, 결코 해당 영화를 폄하 또는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네, 맞습니다. ‘극영화는 다큐가 아니다’라고도 합니다. 네, 그것도 맞습니다. 영화에 가공과 상상력이 덧붙여지는 것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며, 저 역시 그 영화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해 그 기사를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최소 20%가 관람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극화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짚는 것은,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영화로서는 무척 잘 만든 영화고, 전작 ‘명량’보다 뛰어난 점도 많았으며, 후속편이 기다려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난번 지면 기사도, 이번 글도, 모두 영화평이 아닙니다.
이제 지면 기사에서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해보려 합니다.
①거북선은 정말로 그런… 구조였던가?
영화의 스포일러였기 때문에 지면에선 암시만 했습니다만, 사실 영화 ‘한산’이 관객에게 가장 충격을 주는 부분은 듣도보도 못했던 거북선의 구조였습니다. 이순신의 군관 나대용(박지환)은 순천에서 신형 거북선을 만들 것을 고민하다가, 아마도 머리를 보이지 않게 넣었다 뺐다 하는 실제 자라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정말 놀라운 구조의 거북선을 개발합니다. 포를 쏘는 용머리가 평소엔 밖으로 나와 있다가 배를 적선에 직접 부딪혀 파괴하는 충파(衝破) 전법을 쓸 때는 선체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용머리가 적선에 박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단점을 없애고, 충파의 강도도 훨씬 높일 수 있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게 근거가 있는 얘길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런 구조는 불가능해요!” 고선박 전문가인 홍순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수화기 저편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영화에서처럼 용머리를 바퀴에 달아 안으로 집어넣고 여닫이문으로 닫을 수 있는 구조였다면 용머리와 선체 앞부분 모두 고정시킬 수 없어 대단히 불안하고 약점이 많은 설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영화는 기존 거북선 2대와 순천산(産) 신형 거북선까지 모두 3대가 한산대첩에 출격한 것으로 나오지만, 기록상 한산대첩에 나온 거북선은 2대뿐이었습니다. ‘신형 거북선’은 순전히 가공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나대용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량해 적은 인원으로도 운용이 가능한 ‘창선’을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8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을 근거로 이런 설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몇몇 자료에 등장하는 거북선이 ‘머리가 없는 배’로 묘사됐다는 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거북선의 구조는 1795년(정조 19년)에 왕명으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것입니다. 용머리가 짧게 붙어 있는 그림과 위로 솟구친 그림을 볼 수 있죠. 위의 것이 ‘통제영 거북선’, 아래가 ‘전라좌수영 거북선’으로, 1592년 당시 해전에 출동했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중일기’의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간재집’이라는 사료의 존재를 이야기해 줬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동시대의 학자인 이덕홍(1541~1596)의 ‘간재집’에 나오는 ‘귀갑선도(龜甲船圖)’를 보면, 거북선이 머리가 없는 배인 것으로 소개됩니다.
일본에서 1797~1802년에 출간된 소설 ‘회본태합기’에도 역시 머리가 없는 거북선이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신형 거북선의 구조, 즉 머리가 있다가도 사라지는 모습은 이 두 가지 형태의 거북선을 혼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 목격하느냐에 따라 용머리가 있는 것으로도, 없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게 되는 셈이죠. ‘간재집’의 그림은 거북선의 구조를 단순화한 것이고 ‘회본태합기’는 고증이 아니라 상상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영화 속의 새로운 상상력을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②과연 마지막 순간까지 적이 오길 기다렸을까?
영화에선 이순신(박해일)의 부장인 광양현감 어영담(안성기)이 적선을 유인한 뒤 빨리 본대로 귀환해 학익진을 유지하려 애를 쓰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변요한)가 지휘하는 적선은 좀처럼 유인책에 걸려들지 않아 애를 먹는 것으로 나옵니다. 실제로는 유인책을 쓴 것은 맞지만, 그것을 어영담이 맡았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조류도 아군에 불리하다’는 대사가 나오지만 당일 그곳의 조류는 0.5노트(시속 약 0.9㎞)로 해전에 양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였습니다.
‘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이민웅 대구가톨릭대 이순신학과 교수는 “아군 전선 5~6척이 적선 선봉과 전투하다 거짓으로 패해 물러나는 것처럼 꾸미자 일본 함대는 망설임 없이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고,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해 학익진을 형성하며 돌격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산도 앞에 미리 학익진을 형성하고 ‘바다 위의 성’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견고하게 운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학익진을 꾸민 것은 쫓아 온 일본 함대를 포위하는 형세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학익진이란 횡렬진의 한 형태로서 ‘방어’ 대형이 아니라 학 날개 모양으로 상대방을 포위 ‘공격’하는 대형이었습니다.
이순신의 ‘임진장초’ 중에서 해당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성(城)처럼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분명 학익진으로 적선을 에워싼 뒤 돌진해서 각개격파했던 것입니다. 조선 함대는 한산대첩으로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시켰습니다. 나머지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만 도주했죠. 일본 측 전사자는 최소 3000명으로 추정됩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부장인 와키자카 시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은 영화에서처럼 전사했고, 마나베 사마노조(영화에서 한 쪽 눈에 안대를 차고 나오는 자)는 한산도로 상륙한 뒤 자결했습니다.
전투에서 화살을 맞은(영화에서처럼 이순신이 쏜 화살이란 기록은 없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무인도에서 10일 넘게 미역만 먹고 버티다가 간신히 자기 편 배에게 구출됐는데, 와키자카 집안에선 그 후 수백 년 동안 한산도 대첩일인 7월 8일만 되면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미역만 먹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와키자카가 실제보다 훨씬 현명한 장수였던 것처럼 등장하거나, 학익진이 최후까지 기다리는 전법인 것처럼 묘사한 영화 속 설정은 모두 극적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한 장치인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한산대첩을 실제에 가깝게 극화한다면 아군의 일방적인 승리였기 때문에 재미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③한산대첩은 일본군의 중국 상륙을 저지했나?
지면 기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 표시를 한 것에 대해서 보충설명드리자면, 일단 와키자카가 만약 한산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면 조선 수군을 돌파하고 명나라 천진(톈진)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조선 수군이 한산 전투에서 궤멸됐더라면 명나라 입장에선 일본 수군을 저지할 방패가 사라진 형국이 됩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의 해당 기술을 자세히 짚어보죠.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결국 조선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일본군의 명나라 침공까지 막았다는 당대의 평가입니다. 크게 봐서는 전쟁이 중국 대륙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 되겠죠. 이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천진 상륙 밀명을 내렸다’는 설정이 영화에 등장했을 것입니다.
④이순신이 말한 ‘압도적인 승리’는 한산대첩이 아니었다?
영화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순신도 한산대첩 직전 두려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는 장면을 넣었습니다. 1587년(선조 20년) 일어난 녹둔도 전투입니다. 여진족이 두만강 하구의 조선 영토 녹둔도를 습격해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명이 붙잡혀 갔던 사건인데, 당시 이 지역 만호였던 이순신이 추격해 적 3명을 참살하고 포로 60명을 구출하는 분전을 펼치고 녹둔도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원병 요청을 거절했던 북병사 이일이 책임을 전가했던 탓에 이순신은 처음으로 백의종군하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난중일기’에 녹둔도 꿈을 꿨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힘든 전투가 트라우마로 남아 이순신의 꿈에 나타난다는 영화 속 설정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는 이순신의 영화 속 대사에서 ‘압도적인 승리’란 사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한산대첩이 아니라 부산포 해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부산대첩’이라는 표현도 쓰죠. 영화를 가만히 보면 한산대첩은 부산대첩을 위한 전주곡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인데요.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김종대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부산대첩은 옥포, 당포, 한산대첩에 이어 기승전결의 ‘결’에 해당하는 임진년 해전의 대단원이자, 사실상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을 끝낸 전투”라고 말합니다.
일본 수군의 본부인 부산포를 공략해 결정타를 안기자는 이 대담한 계획은 여수 앞바다에서 23일 동안 특수 훈련을 진행한 뒤 육군의 도움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얻어낸 승리였습니다. 진격 중 적선 30척을 격파한 이순신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로 돌진해 정박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의 4차 출정이었던 이 전투가 3차 출정 중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영화 자막에 나오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지금이라도 자막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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