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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중략) 새벽에 나는 품 속의 여진에게 물었다. 밝은 날 어디로 가겠느냐……. 나의 실수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그 여자의 목소리는 진실로 베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김훈 ‘칼의 노래’ 2001년 초판 1권 43~44쪽)
2001년 출간된 김훈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과 인간적인 면모를 비장하고 감각적으로 서술한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습니다. 소설 초반에 ‘이순신의 여인’으로 등장한 인물이 여진(女眞)입니다.
소설 속에서 관기(官妓)였던 여진은 전란 중 이순신 장군과 만나 동침합니다. “그때 서른 살이라고 했다. 기생이라기보다는 관노(官奴)에 가까웠다.” 이순신을 떠난 뒤 왜적에게 붙잡혀 명량해전 직후 적장의 선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이순신은 자못 비정하게 말합니다. “내다 버려라.” 그리곤 혼자 슬픔을 삼킵니다. “나는 치가 떨렸다. 여진의 몸 깊은 곳에서, 이 전쟁을 끝낼 수는 없는 것인가.”
여진의 존재는 장수로서 힘겨운 전란을 겪는 이순신의 외로움과 허무함, 개인적인 슬픔조차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엄혹한 상황을 홀로 견뎌야 하는 곤고함을 극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 때문에 출간 6년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린 ‘칼의 노래’에서도 강렬한 캐릭터로 자리잡았습니다.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이 ‘관기와 동침했다’는 설정에 그렇게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글쎄 뭐, 관기라면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사회적 인식도 함께 바뀌었고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됐습니다. ‘조선시대의 관기라는 건 사실상 공창(公娼) 아니었느냐’는 것이죠. 그런 인식을 대표하는 것이 2013년 소설가 복거일의 말이었습니다. “기생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전형적인 성노예죠.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흑인 노예보다 더 불행한 삶입니다.”
결정적으로 이것이 이순신 장군과 관련돼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직후였습니다. 박원순 지지자로 보이는 한 네티즌이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라는 글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 네티즌은 일단 “피해자를 관노에 비유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난중일기’에 정말로 그런 구절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난중일기’ 중 을미일기의 32일분 누락 부분을 찾아내 처음으로 완역한 인물이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입니다. “난중일기를 비롯해 현존하는 기록 어디에도 이순신 장군이 노비나 기생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순신과 관계를 가진 여성은 처 상주 방씨, 후처 해주 오씨, 첩 부안댁 윤씨까지 처첩(妻妾) 3명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순신 장군이 관노와 잤다’는 인식은 대관절 어떤 연유로 생겨났던 것일까요? 대체로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이 잠자리를 같이 했을 것이라고 일각에서 여겨졌던 가족이 아닌 여성은 다섯 명이었습니다. ①여산 관노 ②개(介) ③최귀지 ④내산월 ⑤여진. 자, 이제 하나씩 따져보죠.
먼저 ①여산 관노. 1597년 4월 21일 ‘난중일기’ 기록은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夕宿于礪山官奴家)’고 했습니다. 여산은 현재 전북 익산시 여산면입니다. 저 원문을 자세히 보시죠. ‘관노의 집’에서 ‘잤다(숙·宿)’고 했지 ‘관노와 잠자리를 함께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노비(奴婢)의 노(奴)는 남자 종, 비(婢)는 여자 종을 말하기 때문에 이 ‘관노’는 남성이 됩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파직과 모친상이라는 두 가지 기막힌 일을 당한 뒤 백의종군하러 가는 참담한 상황이었는데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관노의 집에서 잤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문장을 보죠.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中夜獨坐, 悲慟何堪! 悲慟何堪!)’
다음은 여자 종으로 보이는 ②개(介). ‘난중일기’ 1596년 3월 9일에 ‘개와 함께했다(介與之共)’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공(共)이란 일상적인 만남을 뜻하는 관용적 표기라는 것이며, 만약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의미라면 ‘가까이하다’는 의미로 근(近)자를 썼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은 ③광주목사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 ‘난중일기’ 1596년 9월 19일자엔 ‘최귀지가 와서 잤다(崔女貴之來宿)’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숙(宿)’ 역시 ‘숙박했다’는 의미일 뿐 ‘함께 잤다’는 말이 아닙니다. 양반 가문의 딸과 혼인 없이 동침을 한다?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상황이라면 몰라도,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번엔 ④내산월(萊山月). 이 인물은 전남 영광의 관기였으며, ‘난중일기’ 1596년 9월 11일자에 이순신과 만난 일이 나옵니다. ‘아, 뭔가 있겠구나!’ 짐작한 사람이라면 정작 일기의 원문을 본다면 실망할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영광에 가서 군수와 이야기하던 중에 내산월이 나타납니다. ‘내산월도 와서 같이 만났는데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萊山月亦來見, 酒談向夜而罷). 더 이상의 기록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⑤여진(女眞)입니다. 이 기록은 사실 ‘난중일기’ 가운데서도 가장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왜?
‘난중일기’에서 ‘여진’이 등장하는 곳은 1596년 9월 14일과 15일의 기록입니다.
‘十四日(십사일) 丁未(정미) 晴(맑음) 又留(하루 더 묵음) 女眞○.’
‘十五日(십오일) 戊申(무신) 晴(맑음) 體相行次到縣(체찰사가 현에 이르렀다) 入拜議策(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女眞○.’
이것은 정유재란 전 전쟁이 소강상태였을 때 이순신 장군이 지방 시찰 도중 현 전북 무장(현 고창군 무장면)에 도착해 묵고, 마침 무장에 온 체찰사(지방에 임시로 파견되던 군사 지휘관) 이원익(1547~1634)과 만나 전략을 의논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女眞○’이란 말이 끝에 삽입된 것이죠. 14일의 ‘○’은 마치 ‘卄(이십 입)’처럼 보이고, 15일의 ‘○’은 ‘卅(삼십 삽)’처럼 보이는 글자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보는 사람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여진족’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두만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흉년이라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곡식을 구하러 전라도까지 내려왔고, 젊은 시절 북방에서 여진족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던 이순신 장군은 멀리서 봐도 이들이 여진족인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기 때문에 ‘여진족 20명을 봤다’ ‘여진족 30명을 봤다’고 이틀에 걸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지만 순전히 추측일 뿐이고,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암호처럼 기록했다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결정적으로 당시 여진족이 전라도 무장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여성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들이 ‘난중일기’를 번역할 때 ‘○’에 해당하는 글자를 ‘卄(20)′과 ‘卅(30)′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이름 뒤에 숫자가 나온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의미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민망한 말입니다만...... 엉뚱하게도 일각에선 이것을 ‘성관계 횟수’로 해석하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어쨌든 바로 이 ‘여진’ 기록이 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서 입체화된 여성 캐릭터로 나오게 된 근거였습니다. ‘칼의 노래’ 속 여진은 이순신 장군이 관비와 관계를 맺었다는 일반의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2020년 7월에 기자는 김훈씨와의 통화에서 이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중일기의 해당 부분을 보고 소설 도입부를 썼던 것입니다. 기록에 여진이란 인물의 신분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사대부집 귀부인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에 상민(常民·양반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설정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논란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개입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술 작품을 집필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물론 이것은 충분히 쓸 수 있는 설정입니다.
이제 ‘여진’과 관련해서 남은 문제는 이 두 가지입니다.
(1)난중일기 1596년 9월 14·15일 기록의 ‘여진’은 부족명인가, 인명인가?
(2)만약 인명이라면 ‘女眞○’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최근 노승석 소장이 교육부 산하기관인 한국고전번역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민족문화’ 61권에 논문을 실었습니다. <난중일기의 “여진공(女眞共)”구(句) 해독에 관한 일고찰>입니다.
일단 (1)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나왔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한 1602년 해남 윤씨 집안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서 비(婢), 즉 여자 종인 여진(女眞)이란 인물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 ‘여진’이 이 ‘여진’인 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난중일기’에 기록된 노비의 이름은 여진을 제외하고 ‘옥이(玉伊)’ ‘옥지(玉只)’ ‘갓동’ ‘덕금(德今)’ ‘한대(漢代)’ ‘춘화(春花)’까지 모두 6명입니다. 그런데 이 6명의 이름이 모두 해남 윤씨 분재기에 그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비슷한 시기 두 문서에 똑 같은 이름 6~7명이 그대로 나온다? 이건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더구나 이 분재기엔 1577년 해남 윤씨 집안에서 어떤 인물의 전답을 매입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이요신(李堯臣). 이순신의 둘째 형이었습니다.
‘빙고’라는 말이 나와야 할 대목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지역의 유력자였던 해남 윤씨 가문에서 과거 인연이 있었던 집안 인물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노비 인력을 제공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1602년까지도 여자 종 ‘여진’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 중에 죽었다는 ‘칼의 노래’의 설정은 현실과는 달랐던 셈이 된 것이죠.
그럼 ‘女眞’ 뒤에 기록된 ‘○’은 ‘이십 입’과 ‘삼십 삽’이었던 걸까요? 노 소장이 원로 학자들을 찾아 자문한 결과 모두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일본인의 오독”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무슨 글자였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친필인 ‘난중일기’ 초고본의 초서(草書)를 분석한 결과, 이것은 모두 ‘공(共)’자였습니다.
먼저 ‘난중일기’ 초고본의 ‘女眞○’ 부분을 보겠습니다.
다음, ‘난중일기’ 1596년 7월 5일의 ‘늦게 나가 활을 쐈는데 충청 우후(관직명)도 와서 함께했다(忠淸虞候亦來共)’고 한 부분의 ‘공(共)’자.
모두 한 일(一)자를 긋고 N자가 좌우로 뒤집힌 듯한 모양으로 쓴 뒤 마지막 획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필획과 자형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 소장은 분석 결과 ‘난중일기’ 초고본 다른 부분의 초서에서도 ‘공(共)’자를 이렇게 썼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국내 대표적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전 성균관대 교수의 의견도 같았습니다.
결국 ‘女眞○’의 실체는 ‘여진공(女眞共)’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공(共)’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이 글자는 ‘난중일기’에 모두 72번 나옵니다. 노 소장은 이 용례를 모두 분석했습니다.
대표적인 용례 중 하나가 나오는 곳이 1596년 6월 24일의 기록입니다. ‘경상수사도 와서 함께했다(慶尙水使亦來共)’. 여기서 경상수사는 다름아닌 원균입니다. 설마 이 ‘공(共)’을 무슨 동침... 그럴 리가 없겠죠.
‘난중일기’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용례가 나옵니다.
-군사를 점검하고 뒤처진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했다. 우수사와 가리포첨사도 모여 함께[共] 이야기했다.(1593년 5월 10일)
-광양현감도 와서 우수사 영공(이억기)과 함께[共] 이야기했다.(1593년 5월 26일)
-송한련(군관)이 숭어를 잡아와서 여도첨사, 낙안군수, 흥양현감을 불러 함께[共] 나눠 먹었다.(1596년 2월 6일)
분석 결과 ‘난중일기’ 중 ‘공(共)’은 부하들과의 주연, 회식, 회동, 대화, 모의, 상견, 군사훈련 등의 내용을 기록할 때 참여의 의미로 관용적으로 사용한 단어였습니다. ‘여진공(女眞共)’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의미, 즉 ‘(여자 종) 여진이 함께했다’ ‘이날 업무에 여진이 수행을 했다’는 것에서 그치는 뜻이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共)’은 ‘동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진’은 실존 인물이었으며,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 곁에서 시중을 든 해남 윤씨 집안의 노비였으나 동침했다는 기록은 없고, 당시 나이는 알 수 없으며, 전쟁 중 죽지 않았고 최소한 임진왜란 종전 4년 뒤(1602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이순신에 대해 대체로 ‘여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항복은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란 글에서 “이순신이 군영에 있었던 7년 동안 몸과 마음이 곤고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在軍七年, 苦身困心, 未嘗近女色)”고 했고, 윤휴와 최유해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숙부에 대해 “진영에 있을 때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겨우 4시간 자고서 새벽까지 작전을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노승석 소장의 분석을 검토한 한문학의 권위자인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느 기록도 이순신이 관비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꿈속에서 미인의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까지 일기에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가 호색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실로 봐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노비와 동침했다고 해도 당시 기준으론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짚어야 할 사실 관계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혼외자와 동침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설 ‘칼의 노래’의 예술성과 작품성에 손상이 간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역사와 문학은 다른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이번 추석 연휴 때만 토요일에 배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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