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력이 있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주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불의(不義)를 보고 말 안 하면 용기가 없는 거지요.”(2015년 조선일보 인터뷰) “이승만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없습니다. 공화국을 세운 건 5000년 역사에 처음 아닌가.”(2020년 월간조선 인터뷰)
94년에 걸친 직언(直言)의 한평생이었다.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주저 없이 고향을 떠났고, 유신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으며, 세상이 지나치게 왼쪽으로 기울었다고 여겨졌을 때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묵직하게 설파했다. 지면과 방송, 유튜브를 가리지 않았다.
4일 별세한 김동길 교수는 1928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다. 면장이었던 부친 김병두씨는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돌보며 그와 그의 누나(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 등 4남매를 공부시켰다고 한다. 광복 직전 잠시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고, 1946년 월남했다.
연희대(현 연세대) 영문학과를 다녔고, 미국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주 에반스빌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주제는 링컨이었는데 “링컨은 정직한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귀국 후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잡지 ‘씨알의 소리’ 등에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유신 정권 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학생운동권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때 해직된 뒤 1979년 10·26 때 일시 복직했다가 1980년 신군부의 탄압으로 다시 해직됐으며, 1984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박정희를 회고하며 “유신체제가 잘못된 것이 많지만 조국의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해직 기간 중 에세이, 신문 칼럼 집필과 강연으로 대중과 친숙해지며 ‘스타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콧수염과 늘 매고 다니던 나비 넥타이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떠올랐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면으로 일갈하는 “이게 뭡니까?”라는 그의 말이 유행어가 됐다. 1985년 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직후 ‘3김씨는 이제 정치를 그만두고 낚시나 할 것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 역할을 하라’는 신문 칼럼을 써서 역풍을 맞기도 했다. 1991년 강경대군 치사 사건 직후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가 논란을 빚자 사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해 새 정치를 주장하는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한때 대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92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다.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 갑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신민당과 자민련 등에서 정치 활동을 계속하다 1996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개국 이후 그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각종 시사 프로그램에 ‘최고령 출연자’로 나오면서도 정확한 언변, 정연한 논리와 유머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했을 당시 그가 나오는 시간대만 되면 시청률 곡선이 정점을 찍을 정도였다.
당시 방송 관계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직구’다. 그러나 반드시 논거가 붙는다. 중국 고전과 영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 헌법까지.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도저(到底)한 지식은 이백 살 현자다. 직설에 통찰이 더해지니, 철학이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던 그는 “백성을 이끌고 섶을 지고 불로 가는 사람들”이라며 종북(從北)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조선일보 주말판 ‘WHY’와 ‘아무튼 주말’에 54회 연재한 칼럼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은 사실상 그가 글로 쓴 마지막 역작이었다. 첫 회 정주영부터 마지막 회 김일성까지 온갖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거침없는 필치로 평한 이 글은 숱한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구순을 넘긴 2019년 그는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개설해 유튜버로 나섰다. 채널 개설 1년도 안 돼 구독자가 3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초 안철수 대통령 후보 후원회장을 맡았고 “포기할 줄 아는 아량을 가진 사람만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며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한 결단을 요구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지만 “결혼하지 않았을 뿐 늘 사랑하고 살았고, 여성을 떠나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2011년 10월 2일 생일을 맞아 이철 세브란스병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내가 죽으면 장례식과 추모식을 생략하고 시신은 연세대 의료원에 기증해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길 바란다.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 뜻에 따라 시신은 기증되며, 빈소는 병원 대신 자택이었던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에 마련된다. 장례식 대신 치러질 영결예배는 7일 오전 11시로 예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