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파이프오르간 뒤에 송풍실이란 공간이 있는데,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 등이 여기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등사했다고 합니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일명 ‘문화재 예배당(사적 256호)’으로 불리는 이 건물에서 한교총 순례단을 맞은 이 교회 관계자는 이렇게 안내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엔 그냥 오르간 파이프만 수십개 보이는 벽이었다. 그러나 안내를 받아 강단에 올라 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문이 있었다. 줄지어 벽에 붙은 오르간 파이프의 아래, 성인 허리 높이 정도의 문을 열자 뒤편에서 거짓말처럼 다락 같은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이 송풍실. 이 예배당을 여러 번 방문한 기자도 파이프오르간 뒤에 비밀 공간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3·1운동 당시 일제 경찰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국 감리교의 첫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에 벧엘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1897년이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건물 예배당이다. 미국 감리교가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내렸다. 정동제일교회를 창립한 것은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한 것과 같은 연도이다. 처음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모두 당시의 ‘외교·선교 타운’인 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후 언더우드는 1895년 서대문 안 대로변을 거쳐 1910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돈의문(새문)’ 안쪽에 자리했다 해서 ‘새문안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열고 그 인근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신자가 늘어나자 1895년 새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1897년 완공했다. 이 예배당이 완공되자 당시 한양 사람들이 서양식 건물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고 한다. 예배당은 현재도 수요 예배, 새벽 기도회, 주일 2시 예배 때 사용하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중간중간에 기둥이 최소한으로 배치돼있어 거의 사각지대 없이 강단이 보인다. 당시 한양 사람들에겐 건물 외부의 모양과 함께 내부의 툭 트인 공간 역시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벧엘예배당은 수많은 토론회, 연주회, 연극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예배당에 파이프오르간이 처음 설치된 것은 1918년.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였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인 하란사(금란사)가 재미한인과 미국 크리스천들의 모금을 통해 구입해 설치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스토리를 품은 파이프오르간은 6·25전쟁 때 파괴됐다. 현재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은 당시 설계도 등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동제일교회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 대표 이필주(1869~1942)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던 교회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와 함께 당시 개신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이 목사의 사택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고 한다. 담임목사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 교인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니 정동제일교회는 3·1운동의 중심일 수 밖에 없었다. 3·1운동 후 일제는 이필주 목사를 비롯한 교역자들과 신자인 학생들을 체포했고, 예배를 인도할 사람이 없어 1919년 봄부터 가을까지 정동제일교회는 사실상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한다. 당시 2200여명에 이르던 교인 수는 3·1운동을 거치며 1100여명으로 대폭 감소했다고 한다. 벧엘예배당은 이런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6·25 전쟁 후 파괴된 문화재예배당을 복원한 후 1979년 현재의 예배당인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벧엘예배당은 그대로 보존했다. 덕분에 19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120년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 속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으로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