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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6일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10월 26일에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한 두 사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박정희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글을 얼마 전 쓴 적이 있었습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5/24/EKTI6EQPX5BLTKBS2B3IDDDZDI) 그러나 한 가지 확연히 다른 점이 있죠. 총을 쏜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1909년에 총을 쏜 사람은 1979년에 총을 쏜 사람처럼 사사로운 권력욕이 없었을뿐더러, 총을 쏜 다음에 남산으로 갈지 용산으로 갈지 망설이는 일 따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문화계가 ‘안중근 열풍’에 휩싸였다는 기사가 최근 났습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2/10/11/CDAIJT6XCVDCRLGCAD7MHIP32E/) 김훈의 소설 ‘하얼빈’에 이어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 그 원작인 뮤지컬 ‘영웅’이 각각 스크린과 무대 위에 오른다는 얘기죠. 왜 안중근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외쳤던 두 개의 이슈, 약육강식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과 동양 평화는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다.”(김훈)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코로나 사태, 경제 불황처럼 어려운 시기에 불려나와 긍지와 위로, 자극을 준다.”(윤성은 영화평론가)
자,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여러 차례 많은 문화 장르로 소비되고 또 생산되고 있는데도, 과연 우리는 안중근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 걸까요?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안중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섯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겠습니다.
①처음엔 일본을 믿었다?
이것은 누가 한 말일까요.
“1905년 러일전쟁에 즈음하여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또 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 러시아와 싸웠으므로 한국인은 다 감격하여 일본인과 같이 출전하여 활동한 사람도 있다. 또 한국인은 일본의 승리를 마치 자국이 승리한 듯이 기뻐하고 이에 의하여 동양의 평화는 유지되고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었다.”
이 충격적인 말은 얼핏 보면 어느 친일파가 한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1910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다면 안 의사의 이어지는 다음 진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가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5개조의 조약(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전의 선언과 반하여 한국의 불이익이 되었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불복을 칭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07년 또 7개조의 조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통감이었던 이토가 병력으로 압박을 가하여 체결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크게 분개하여 일본과 싸우더라도 세계에 발표할 것을 기했다.”
만약 1905년 러일전쟁 종전 이전의 상황에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친일파’라는 용어를 붙인다면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 같은 인물도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용어는 시기적으로 무척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때나 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러일전쟁이 끝나기 전의 상황에서 상당히 많은 한국인은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치고 아시아의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이들 모두가 친일반민족행위자는 결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러일전쟁은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쳐서, 멀리 튀르키예에서는 이때부터 같은 아시아인이면서도 서양인을 이긴 일본을 ‘형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훗날 6·25 전쟁에 참전한 인연으로 (나중에 잘살게 된) 한국을 ‘형제’라고 부른 것과는 비슷해 보여도 조금 다른 맥락이었던 것이죠.
안중근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게 된 계기는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일본은 뱀과 고양이같이 한국을 배신했다”며 일본에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조직인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 됩니다. 훗날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를 총살했다”고 밝혔던 그 신분입니다.
②안중근 아닌 ‘숨은 저격수’가 쐈다?
‘사실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수십 년 전부터 계속 돌았습니다. 음지에 도사린 스토리는 쉬쉬하며 은밀하게 이야기할수록 더욱 진실에 가까워지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게 마련입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안중근’ 항목에도 버젓이 설명돼 있습니다.
이 ‘제3자 저격설’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대표적 안중근 연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최서면(1928~2020) 전 국제한국연구원장을 찾아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진원지는 1942년에 일본에서 나온 ‘무로다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라는 책 한 권이었습니다.
무로다는 안중근 의거 당시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이었습니다. 무로다는 1938년에 죽었고 이 책은 4년 뒤 무로다 생전의 이야기를 모아 출간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공신력이 확 떨어집니다. 본인이 직접 쓴 것도 아니라는 얘기죠. 저자를 알 수도 없고 집필 목적도 불확실한, 한마디로 괴서(怪書)인 셈입니다.
그럼 이 책에선 무로다의 말을 빙자해서 과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을까요? “이토 공이 맞은 탄환은 안중근의 브라우닝 권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제 기마총(騎馬銃)에서 발사된 것이다.” 기마총이란 권총보다는 길고 소총보다는 짧은 카빈총입니다.
이토가 피격당하던 그 상황에서 하얼빈역 1층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 의사가 권총으로 쏜 것이 아니라, 2층에 숨어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범’(이 음모론이 꼬리에 꼬리를 문 나머지 ‘러시아 비밀조직원이 그 실체’ ‘일본 제국주의를 견제하려는 전세계 유대인의 소행’이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로도 발전이 됐다고 합니다)이 카빈총으로 비스듬히 내려 쐈다는 얘깁니다. 거짓말이란 디테일한 군더더기가 더 붙을수록 진짜 같아 보이는 법. ‘무로다 옹의 이야기’란 책에서는 이런 설명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식당은 격자 구조로 돼 있어 아래로 쏘기에는 절호의 장소였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총탄이 비스듬히 내려가도록 쏜 결과,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이 모두 그런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듯 책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이토 피격 진술도’를 수록했습니다.
이 그림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사가 수평으로 쏜 총에서 발사된 탄환일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최서면 원장은 “그림 자체가 근거 없는 날조”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무로다는 이토의 몸 속에 있는 총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총격을 받고 열차 안으로 옮겨진 이토가 30분 만에 사망하자 러시아 측이 부검을 건의했으나 일본 측은 “감히 이토 공의 몸에 칼을 댈 수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열차는 이토의 시신을 싣고 황급히 하얼빈을 떠났습니다. 무로다는 이토가 쓰러진 뒤 부축해서 열차로 옮긴 순간 수행했을 뿐, 이토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했습니다.
열차가 일본 조차지인 관동주(關東州) 다롄(大連)에 도착한 뒤 수행 의사, 다롄병원장, 관동군 군의관이 긴급 회의를 열어 부검 여부를 논의했으나, 몸 속의 탄환을 꺼내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이토 몸 속의 탄환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
그러나 이토를 쏜 총에서 나온 탄환은 딱 한 발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토 옆에 있다가 다리를 부상당한 사람이 만철(滿鐵) 이사였던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였는데, 그가 죽은 뒤 유족은 이 총탄을 도쿄 헌정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카빈총이 아닌 권총 탄환이었습니다. 한 일본 르포 작가가 무로다 책을 본 뒤 총알 감식을 의뢰해 그 결과를 책으로 냈는데 “아무리 입을 놀려도 권총알이 카빈총알로 둔갑할 수는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토의 몸을 부검하지는 못했지만 탄환이 박힌 시신을 직접 본 사람이 단 한 명 있었습니다. 이토의 수행 의사, 즉 주치의인 고야마 젠(小山善). 최서면 원장이 2013년 일본 외무성에서 발굴한 자료는 바로 고야마가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자료였을까요? ‘이토 공작 만주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 별책 제1권 메이지(明治) 사십이(四十二)’. 지금까지 저 정체불명의 ‘이토 피격 진술도’가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라면(사실 그게 저였습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자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토의 사망진단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그림 한 장이 수록됐습니다. 제1탄은 오른쪽 팔뚝 위를 관통해 오른쪽 갈빗대 부분을 거쳐 심장 아래, 제2탄은 오른쪽 팔꿈치→흉막→왼쪽 늑골 아래,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좌측 복근에 박혔다는 것을 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세 발 모두 ‘수평으로 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2층에서 아래로 쏜 총탄에 비스듬히 맞았다’는 것은, 이토의 사망 현장에 없었고, 총알과 이토의 시신의 총탄 흔적 모두 보지 못했으며, 담당 의사도 아니었던 무로다가 했다는 말을, 무로다가 죽은 지 4년 뒤에 나온, 저자도 누군지 모르는 책에 나온 얘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황망한 이야기가 이후 만만찮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제3자 저격설’이 사실인 것처럼 쓴 소설이 전후(戰後) 일본에서 3종이나 나왔고, 20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무렵 또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음모론이 돌았던 것일까. 최서면 원장은 말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약하고 활기 없는 민족이 어떻게 감히 이토 공을 쏠 수 있겠느냐는 민족적인 멸시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인이 그런 거사를 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③안중근은 도대체 몇 발의 탄환을 쐈나?
뮤지컬 ‘영웅’은 어둠 속에서 일곱 발의 총성이 들리고 화면에 일곱 개 별이 박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북두칠성에서 딴 안중근 의사의 ‘응칠’을 하얼빈에서 쏜 탄환 ‘일곱 발’과 매치시킨 흥미로운 연출입니다.
그런데, 일곱 발이라고요? 여러분, 안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모두 몇 발의 탄환을 쐈다고 알고 계십니까? 저는 분명 어렸을 적 위인전에서 ‘여섯 발’이라고 기록한 것을 진실로 알고 있었는데, 자료마다 그 숫자가 모두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학자에게 전화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대답이 이랬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신문사 입사 뒤로 20년 넘게 육하원칙과 팩트의 중요성을 신조처럼 여기고 살아온 저로서는 어쩐지 그의 모습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라기보다는 해석만 중요시하는 평론가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중근이 쏜 탄환은 모두 일곱 발이었습니다. 권총은 벨기에제(製) 브라우닝 M1900였죠. 이 총은 탄창에 일곱 발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통 ‘7연발’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약실에 한 발을 더 끼울 수 있기 때문에 ‘8연발’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이 총을 품고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여덟 발을 모두 채웠습니다. ‘천주교 신자여서 일부러 십자(+)를 새겼다’는 통설이 있었습니다만, 재판에서 안 의사의 동지 우덕순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흔히 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시장에 나올 때 그렇게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총탄이 명중했을 때 회전하면서 파고들어 살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노려 제작자나 유통 관련자가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안 의사가 일부러 십자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가 기차에서 내린 것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었습니다. 플랫폼에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이토가 열차 쪽으로 되돌아올 때, 찻집을 뛰쳐나온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뒤로 바싹 붙어 서 있다가 이토와의 거리가 10보 정도 됐을 때 권총을 뽑아들고 의장대 병사들 사이로 이토를 향해 모두 네 발을 쐈습니다.
탄환 4개 중에서 3개가 이토에게 명중했습니다. 빗나간 한 발은 일본 주(駐)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습니다. 권총에 남은 탄환은 이제 4개. 안중근은 그걸 마저 다 쏘려 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옥중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수염이 흰 조그만 노인을 이토라고 판단해 단총을 뽑아들고 4발을 쏜 뒤,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젓해 보이는 다른 자에게 3발을 더 쐈다.”
다시 쏜 3발은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는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의 왼쪽 허리를 관통해 배에 박혔습니다. 또 하나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의 왼쪽 다리를 맞혔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탄환이죠.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 탄환이었을 남은 하나는, 옷감 털이 십자 홈에 낀 채 플랫폼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일본 검찰관은 이 탄환이 만철 총재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의 외투와 바지를 뚫은 뒤 ‘다른 사람’의 바지를 또 한번 관통해 떨어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바지 하나만 총알에 관통당한, 대단히 운이 좋았던 마지막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음모론의 근원이 됐던 그 인물입니다. 참 희한한 일이죠.
그렇다면 총 속에 있던 마지막 제8탄은 어떻게 됐을까요? 총신이 화약 연기로 검게 그을린 가운데 총구 안에 장전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쏘지 못한 것이죠. 법정에서 ‘혹시 자결하려고 남겨 놓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안 의사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었고,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주변의 러시아 병사들에게 제압당했기 때문에 마지막 탄환을 쏘지 못한 것이고, 쏜 탄환 중 제7발이 누구도 맞히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도 6발을 쏜 뒤 이미 제압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총 8발 중 6발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쏴 명중시켰고, 한 발은 총신 속에, 한 발은 차디찬 역사(驛舍) 바닥에 남겼던 것입니다.
④거사를 마친 안중근은 어떤 행동을 취했나?
거사를 끝내고 러시아 병사들에게 제압당한 안중근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분명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었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제각각 다릅니다만 대체로 이렇게들 기억합니다.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말이 되지 않지만 ‘대한민국 만세’라 쓴 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들어설 때 태극기를 지니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최대한 일본인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검문에서 적발되기 쉬운 태극기 같은 소지품을 가지고 갔을 리가 없습니다. 이미 물리적으로 제압돼 마지막 탄환을 쏘지 못한 상황에서 손으로 무엇을 들고 흔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코레아 우라!”였다고 합니다. 러시아어로 ‘한국(대한제국) 만세’란 뜻이죠. 만약 한국어로 외쳤다면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국제 공용어인 에스페란토로 ‘코레아 후라’라고 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뜻은 같습니다.
⑤이토는 죽으면서 ‘바카야로’ 욕설을 했나?
사실 저도 얼마 전까지 이 얘기가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국내 전기류에서조차 사실인 듯 실은 이야기니까요. 이토가 죽기 직전 “나를 쏜 자가 누구냐?”고 묻자 수행원이 “조선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말을 들은 이토는 “바카야로(바보 같은 놈)”라 내뱉고 숨을 거뒀다는 얘기죠.
심지어 이 얘기는 최근 출간된 김훈 소설 ‘하얼빈’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묘사됐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나를 죽이다니 멍청한 일이군’ 또는 ‘내가 살아있어야 조선이 아주 멸망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제 너희들은 꼼짝없이 망했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토의 사망으로부터 불과 10개월 뒤 대한제국은 멸망했으니까요.
하지만 이토가 살아있었다고 해서 대한제국은 더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은 “을사늑약에서 경술국치까지 5년(1905~1910)이란 시간이 지체된 것은 만주 이권을 둘러싼 일본·러시아·미국의 각축전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1909년의 상황에서 이미 대한제국은 내정 관할권과 군대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미 서울에 설치된 통감부는 총독부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고 일본을 압박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거가 일어났던 1909년 10월에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을까요? 아니, 그 말의 출전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바로 앞에서 나온 그 괴서, ‘무로다 옹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설명했듯이 무로다는 이토 사망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토가 했다는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이토를 저격한 사람이 한인이라는 사실은 이토의 시신을 실은 열차가 출발한 다음에야 밝혀졌기 때문에 이토는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1984년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로부터 “할아버지는 총격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유언은 한 마디도 없었다”는 확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카야로’는 이토가 안중근에게 한 말이 아니라, 1942년에 그런 말을 지어낸 이름 모를 일본인에게 지금 제가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심한 일본인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시가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비록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긴 합니다만, 그의 시 ‘코코아 한 잔’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은 지금 읽어봐도 놀라울 뿐입니다. 이 책은 제국주의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중·일 3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이 뤼순(旅順)을 중국에 돌려 주고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사 항구를 만들어 평화회의를 조직하자는 것입니다.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고 이들에게 2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공동 중앙은행을 설립해 공동 화폐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유럽연합(EU)을 연상케 하는 평화 체제 구상이, 과연 어려서 한학 교육을 받은 30대 초반의 청년에게서 나올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는 26일은 안중근 의거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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