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우리마을 '촌장'인 김성수 성공회 주교. /박상훈 기자

‘이렇게 성공한 인생이 또 있을까.’

최근 출간된 ‘우리 마음의 촌장님’(성공회출판사)을 펼치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각계각층 93명이 기억의 조각을 맞춰 만든 ‘큰 바위 얼굴’, 대한성공회 김성수 시몬(92) 주교 헌정 문집이다.

김 주교는 1964년 성공회 사제가 된 후 서울교구장·관구장을 지낸 성공회의 큰 어른.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학생과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서울 정동 주교좌성당으로 피신시키고 미사를 집전했으며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성공회 나눔의집’ 설치를 적극 후원했다. 1974년엔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세웠고, 유산으로 받은 고향 강화도 온수리 땅 3000평을 기증해 2000년 발달장애인 일터인 ‘우리마을’을 세웠다. 김 주교는 우리마을 ‘촌장(村長)’을 맡아 구내에 함께 살며 수시로 장애인들과 함께 “우리는, 최고다!”를 외치며 삶의 용기를 북돋우고 있다.

발달장애인 일터인 '우리마을' 앞에 선 김성수 주교. 고향인 강화 온수리 땅을 기증해 '우리마을'을 설립한 김 주교는 '촌장'을 자처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태훈 기자

필진 93명의 면면은 김 주교가 성직의 울타리를 넘어 이 시대의 어른임을 보여준다. 정철범·박경조·김근상 주교 등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 우리마을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은 물론 1960년대 말부터 인연을 맺은 조영남·윤형주·이장희·양희은·윤여정 등 ‘세시봉’ 멤버, 손학규·김성재 전 장관, 동네 주치의, 70년 고향 후배까지 망라됐다. 이경호 서울교구장의 간행사를 빼면 책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글은 강화도 이웃인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이다. 장윤 스님은 김 주교를 마을을 지키고 구심점이 되는 ‘노거수(老巨樹)’에 비유했다.

1974년 5월 발달장애인 특수 학교인 성베드로학교 개교 당시 김성수 주교(뒷줄 오른쪽 세번째). /우리마을 제공

◇누구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 분

“누구도 가르치려 하지 않으신 분”(윤여정) “여유를 선물하신 분”(이장희) “지난 시절의 힘과 명예를 주장하는 어른들이 많은 세상에 오가는 그 눈빛과 웃음 속에서 그냥 무조건 기분 좋고 위로가 되는 분”(양희은) “‘나는 한 것이 없어. 다 주변 사람들이 했지’라고 말씀하는 분”(이영선 후원자) “보통 인간들이 탐하는 물욕, 권력욕, 명예욕 하물며 건강욕조차 이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정구 성공회대 전 총장) “일반인과 똑같이 접수하고 기다리고 진찰받고 진찰비 내고 떠나시는 분”(남궁호삼·강화 남궁의원 원장)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앵벌이예요. 공익적인 앵벌이’라고 말씀하신 분”(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1999년 12월 우리마을 준공식. 우리마을은 2000년 3월 정식 개원했다. /우리마을 제공

◇”장애인은 좋은 집에 살면 안 되나?”

필진의 기억 속 김 주교의 모습은 ‘중심을 지키는 따뜻함’이다. 강지원 푸르메재단 이사장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격동기의 광화문에서 경찰에 쫓기던 시위 학생들을 피신시켜 주시면서도 과격하게 흥분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다독이신 주교님”을 기억한다.

‘촌장’이라고 적힌 모자를 쓴 성공회 김성수 주교. 김 주교는 유산으로 받은 고향 땅 3000평을 기증해 발달장애인 일터인 ‘우리마을’을 설립한 후 촌장을 자처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최근 각계각층 93명의 인사가 김 주교와의 인연을 적은 헌정 문집이 발간됐다. /장련성 기자

신경하 전 감리교 감독회장은 이희호 여사를 강화읍내 작은 뷔페에 초대한 모습을 기억한다. 특별한 식당은 아니었지만 ‘식당 주인 수고에 힘을 보태고, 좋은 소문을 내주려는 의도’로 일부러 모시고 갔다는 것. 신성식 성베드로학교 전 교장은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맨손으로 일하는 김 주교에게 장갑을 끼시라고 권하니 “예수님이 일할 때 장갑 꼈다는 얘길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반문한 모습을 기억한다. 성공회 홍영선 신부는 ‘우리마을’ 건축 당시 비용 절감 아이디어를 냈다가 호통을 들었다. “야 인마! 왜 장애인이라고 허름한 건물에서 지내야 되냐? 좋은 집에서 살면 안 되니? 나는 좋은 집,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장애인)을 살게 해주고 싶다. 더 이상 반대하지 마라.”

김성수 주교가 '우리마을' 전기부품 조립장에서 장애인들과 함께한 모습. 김 주교는 발달장애인이 우리마을에서 퇴직한 후 지낼 시설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마을 제공

‘우리마을’ 신축 당시 보건복지부 사무관이었던 김진우 덕성여대 교수는 IMF 때문에 예산을 통째로 삭감할 뻔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자 김 주교는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로 “아이, 그럼요. 괜찮아요. 그렇게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당시 예산은 살아나 우리마을은 무사히 완공됐다.

김성수 주교 헌정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 표지.

◇”성당에 사람 보고 나오나? 주님 보고 나오는 거지”

윤형주씨는 연예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와 불화 때문에 교회를 성공회로 옮길 생각에 김 주교와 상담했다. 그러나 김 주교는 “한 가정의 신앙은 가족 모두 일치되는 것이 성경적”이라며 “다시 너희 집안의 교회로 돌아가거라”라고 단호히 정리했다고 한다. 서울주교좌 성당 신자인 탤런트 사미자씨는 김 주교 은퇴 후 허전한 마음에 한동안 성당 출입이 뜸했다가 김 주교에게 한마디 들었다. “성당엔 사람 보고 나오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을 보고 나오는 거지.”

김성수주교기념사업회가 책을 낸 것은 “김 주교님 건강하실 때 정리해두자”는 차원이다. 기념 다큐도 제작 중이다. 사업회는 김 주교의 서품 기념일에 맞춰 12월 6일 오후3시 서울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