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광장 옆 국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핵심은 5층 역사관이다. 189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여정을 보여주는 주(主)전시실이다. 관람 코스를 따라 돌다보면 2018년 문재인·김정은 판문점 회담 사진이 눈에 띄게 들어온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손을 맞잡은 장면이다. ‘평화와 갈등’이란 주제 아래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사진에 이어 결론처럼 마지막에 배치됐다.
판문점 회담 사진은 2020년 6월 박물관이 40억원을 들여 역사관을 개편하면서 포함됐다. 당시 정부가 대표 치적으로 내세우는 정치 이벤트를 박물관이 앞장서 홍보해서야 되겠느냐며 박물관의 정치화(政治化)를 우려하는 지적이 나왔다. 2020년 6월이면,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도발 수위를 높일 때다. 문 대통령을 향해서도 이미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삶은 소대가리’ 같은 막말을 쏟아낸 터였다. 정상회담을 통한 북핵(北核) 폐기나 평화 분위기는 물 건너간 뒤였다.
◇북은 핵 선제공격 발표, 미사일 쏘아대는데…쇼 같은 ‘판문점 회담’ 전시
지난 5월 문재인 정부 퇴진 이후에도 역사관의 판문점 회담 코너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김정은이 핵무기로 대한민국을 선제공격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전술핵 미사일 발사 훈련을 이끄는 중에도 그랬다. 북(北)은 이달 초 국가 애도 기간에도 동·서해상에 미사일을 발사했고, 이 중 한 발은 6·25 이후 처음으로 동해 NLL(북방한계선) 남쪽 26㎞ 공해상에 떨어졌다. 연(年) 최대 100만명이 찾는 이 박물관 관객들은 쇼로 끝난 남북 정상회담 전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문재인 정부의 ‘역사 알박기’다.
◇김원봉은 있지만 이승만은 없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일제시대 내내 독립 외교 활동을 펼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설명하는 변변한 전시물 하나 없는 것도 기이하다. 영문 저서 한 권을 전시한 게 거의 전부다. 임시정부 요인 사진에서도 이승만은 찾을 수 없다. 광복 후 월북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김원봉까지 실으면서 이승만은 외면한 것이다.
해외 독립운동 코너에선 조선민족혁명당 미주 총지부의 1943년 반일 시위와 조선의용군의 선전활동 사진을 대표 격으로 실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이 지도권을 장악한 단체로, 미주 총지부 간부 중엔 광복 이후 북한으로 넘어간 이들도 있다. 조선의용군은 북한 인민군 창설에 참여한 무장 단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를 이끌고 1940년대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활약한 이승만은 보이지 않는다.
◇'백년전쟁’ 영상 출연자가 박물관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이승만 홀대는 문재인 정부의 반(反)이승만 코드에 발맞춘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 정부 수립 70주년을 겸한 8·15 경축사에서 이승만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2019년 임시정부 100년을 기린다면서 광화문 정부 청사에 내건 독립운동가 10명 초상화에 이승만은 빠졌다. 문재인 정부의 첫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을 지낸 주진오 전 상명대 교수는 이승만을 ‘친일파’ ‘하와이 깡패’로 조롱한 동영상 ‘백년전쟁’에 출연, 이승만을 거짓말쟁이처럼 비난한 인물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 이후 처음으로 역사관을 본격적으로 개편한 게 주진오 관장 재임(2017년 11월~2020년 10월) 때였다.
‘촛불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의 운동권 사관(史觀)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곳곳에 남아있다. 5층 역사관 피날레 주제는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대형 패널에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여중생 추모 집회(2002년)와 광우병 시위(2008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2016년) 사진을 커다랗게 전시했다. 탄핵 반대 집회와 납북자 가족 모임 기자회견도 끼워넣었지만 밑바닥에 배치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박물관이 내건 역사관 취지는 ‘민(民)이 주인임을 자각하고 근대적인 국가 만들기를 모색한 시기에서 출발’한다고 했는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해 ‘촛불 집회’로 마무리된다. 반(反)정부 시위나 거리 집회로 대한민국의 성취를 설명한다는 게, 터무니없는 ‘운동권 사관(史觀)’이다.
◇국군 포로 외면한 ‘전쟁 포로’ 특별전
주진오 관장 재임 당시 열린 특별전도 논란거리였다. 2018년 6·25 정전 65주년 ‘전쟁 포로’ 특별전은 주로 유엔군 포로수용소 실태를 다루면서 국군 포로, 특히 전후 돌아오지 못한 수만 명의 국군 포로를 빠뜨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탈북 국군 포로 유영복씨는 “국가가 세운 박물관이 어떻게 국군 포로를 망각할 수있나”라며 허탈해하기도 했다. 1994년 이후 귀환한 탈북 국군 포로 80명도 다루지 않았다.
같은 해 열린 ‘4·3사건 70주년 특별전’도 논란이 됐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반미 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는 남로당 선전 문구를 그대로 내걸어 반감을 샀다. 지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공무원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 잔혹하게 살해한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봉기’ ‘항쟁’으로 치켜세우고 미화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대사 박물관, 정치 오염에서 벗어나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정치적 독립성은 개관 때부터 논란이 됐다. 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면서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직속 기관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이전엔 “전시가 지루하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균형을 맞추느라 고심했는데, ‘촛불’ 적자(嫡子)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와 코드를 맞춘 인사가 관장을 맡으면서 박물관의 정치적 오염은 갈수록 심해졌다.
작년 5월 부임한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주진오 전 관장이 주도한 역사관 개편에 반대하다가 좌천된 박물관 내부 인사다. 주 관장 퇴임 후 공모를 거쳐 선임됐다. 남 관장은 “연내에 광복 직후 시기를 다룬 전시를 손볼 예정”이라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도 균형감을 유지하도록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근대사 연구자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국립 현대사 박물관이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여야가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면서 “이대로 가면 5년에 한 번 정권 교체 때마다 전시를 다 바꿀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근혜 초상화는 안 걸고, 이명박 표지석은 철거
文 정부의 옹졸한 ‘박물관 정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주진오 관장 재임 기간 내내 정치적 편향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박물관 개관 당시부터 있던 역대 대통령 코너에 퇴임한 박근혜 전(前) 대통령 초상화를 걸지 않고 2년여 버티다 코너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역대 대통령 코너는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창 아래 이승만부터 이명박까지 역대 대통령 초상화 10점을 전시하던 방이다. 관람객들이 대통령 휘장과 함께 청와대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촬영하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박물관은 퇴임 2년이 넘은 2019년 3월 말까지 박 대통령 초상을 걸지 않았다. “박 대통령 사진은 왜 없느냐”는 관람객 항의도 있었지만, 박물관 측은 “박 대통령 초상화를 언제 걸지는 물론 역대 대통령 코너를 계속 운영할 것인지 정해진 게 없다”고만 했다. 박물관은 2020년 6월 역사관을 개편(코로나 사태로 일반 재개관은 7월)하면서 역대 대통령 코너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 자리엔 관람객 휴게실을 설치했다. 박물관 내부에선 “주 관장이 박근혜 대통령 초상화를 거는 게 마뜩잖아 미루다가 역사관 개편을 핑계 삼아 아예 코너를 없애버렸다”는 말이 나돌았다.
박물관 입구에 있던 이명박 전(前)대통령의 친필 표지석을 2019년 2월 철거한 것도 주진오 관장이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했고, 박물관이 개관한 2012년 12월 26일 당시 재임 중이었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최근 “주진오 당시 관장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표석을 치우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철거된 표지석은 박물관 하역장에 방치됐다가 수장고 보관을 거쳐 3년여 만인 지난 9월 원위치에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