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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수십년 전, 초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적혀 있던 임진왜란 장(章)의 마지막 문장이 지금도 토씨 하나까지 잊히지 않습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끝내는 최후의 전투이자 조선에게는 대첩(大捷)이었으며 일본에게는 지옥도와도 같았던 해전이 노량해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웅처럼 이순신은 그 해전에서 전사합니다.
이 극적인 결말은 두 가지 커다란 의문을 남겼습니다.
첫째, 이순신은 왜 마지막 전투에서, 그것도 크게 이긴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전사했는가?
둘째,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이었는데 왜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근접전을 펼쳤는가?
저 혼자만의 의문이 아니라, 참으로 한국사의 고전적인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을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갑자기 출현했습니다. 이순신 전문가로서 ‘난중일기’의 유실 부분을 찾아내 처음으로 완역했던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지난 6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부터 한 자료의 해독을 의뢰받게 됩니다.
그것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최근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문화재로서 ‘대통력(大統曆)’이라는 달력이었습니다. 대통력이란 중국 명나라 말기에 만든 역법으로, 그것이 고려와 조선에 전해져 해마다 대통력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을 만들어 널리 썼습니다. 날짜 옆 공백에 소장자의 일정이나 생각 같은 것을 적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다이어리’나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서기 1600년인 경자년(庚子年)의 달력이었습니다. 1600년의 대통력은 우리나라에 남아있지 않은 희귀본입니다. 물론 이 자료의 가치는 그런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뒤에 밝혀지게 됩니다.
이 유물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고, 일본인 소장자가 2년 전 사들인 것을 김문경 교토대 명예교수가 그 존재를 알게 됐으며 지난 5월 한국 문화재청에 “중요한 자료”라는 제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재청 측은 실물에 앞서 그 내용부터 입수해 노 소장에게 해독을 맡겼습니다. 왜 노 소장에게 의뢰한 것이었을까요?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가 노 소장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파악해 본 바로는 말입니다….”
“……?”
“이 대통력에 글씨를 남긴 사람이 바로… 서애 유성룡 같습니다.”
유성룡(1542~1607). 퇴계의 제자였으며, 임진왜란의 전란기에 영의정으로서 국난 극복의 최정점에 있었던 명재상. 그러나 마치 20세기의 윈스턴 처칠처럼 종전과 함께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던 인물. 그리고 이순신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았던 벗(조선시대에는 네 살 정도 차이나는 사람까지는 친구로 지냈다고 합니다)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사람. ‘징비록’의 저자. 그래서 문화재청은 이 문서에 ‘유성룡 비망기입 대통력-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로 그 유성룡이 ‘징비록’이나 ‘서애집’에도 남기지 않은 기록이 ‘대통력’의 여백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노 소장의 눈이 커졌습니다.
“아, 그렇군요.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문서 표지에 글자가 많이 적혀 있는 부분이 있는데, 초서로 돼 있어 글자를 잘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만, 그 속에서 ‘여해(汝諧)’라는 두 글자가 보입니다.”
여해? 이런 세상에, 여해라니!
원래 ‘서경(書經)’에서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양위하면서 ‘오직 너라야 화평케 하리라(유여해·惟汝諧)’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된 이 두 글자는, 전쟁 극복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두 글자는, 바로.
이순신의 자(字)였습니다.
“아아, 충무공과 관련된 기록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해독해내겠습니다.”
노 소장은 자료를 받아 두 달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해독에 매달렸습니다. 원래 표지가 찢어졌기 때문인 듯, 다른 종이를 써서 책 맨 앞에 덧댄 이 표지에는 모두 83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표지에 쓴 글자라... 경자년의 다른 모든 내용을 압도하는 중요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 것일텐데, 이순신이라니!’
끝내 그는 표지를 포함한 문서 전체의 해독에 성공했습니다. 우선 유성룡의 기록인 것은 확실했습니다. 정유년(1597)의 비망 기록과 이순신 장군을 위한 애도시 등 현전하는 서애 친필과 비교해 보니 필체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성룡은 이 문서의 표지에 과연 무엇을 썼는가? 종이 아랫부분이 찢겨 일부 글자가 사라졌지만 초서로 흘려 쓴 글씨 83자가 해독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業甚饒 余曰 倭等將行 有恒頓 爲之一笑…
先已又言 初汝諧 在古今島 聞余被論罷…
太息曰 時事一至於此乎 自是每於船中 酌水…
戰日 親當矢石 褊裨陣止曰 大將不宜自輕…(不)
聽 親出督戰 旣而爲飛丸所中而死 嗚呼…
이것을 노 소장이 번역한 내용은 이랬습니다.
…과업이 매우 많다. ①내가 말하기를 “왜군들은 장차 떠나려고 할 때 항상 머리를 조아려서 한바탕 웃었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이미 또 말하였다. ②당초 여해(이순신)가 고금도(古今島)에 있을 때 내가 논핵을 받아 파직된 것을 듣고…
크게 탄식하기를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매번 배안에 있을 때는 맑은 물을 떠놓고…
③전쟁하는 날에 직접 시석(矢石)을 무릅쓰자, 부장(副將)들이 진두지휘하는 것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하여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아아!…
글이 ‘오호(嗚呼)’라는 감탄사에서 끊겨 오히려 여운을 더합니다. 사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노 소장은 “‘친출독전(親出督戰·직접 출전하여 전쟁을 독려)’ 앞에 있는 ‘청(聽)’자 앞에 있는 글자는 문맥상 ‘불(不)’이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불청(不聽)’, 즉 ‘듣지 않고’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록에선 기존의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았던 임진왜란 말기의 사실 세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죠.
자, 먼저 ①을 보겠습니다. 전후 문맥이 잘려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이것은 평소 기세등등한 태도를 보이던 일본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철군이 결정되자 급속히 풀이 죽었다는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성룡을 만나고 돌아갈 때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했다는 얘깁니다. 일본군의 분위기가 급격히 침체됐다는 것이죠. 그걸 보고 유성룡이 껄껄 웃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김준엽(1920~2011) 전 고려대 총장의 회고록 ‘장정(長征)’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김준엽은 일제 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온갖 고난 끝에 대륙을 횡단, 충칭(重慶)의 광복군에 입대합니다. 국내 진공 훈련을 받던 중 일제가 항복하고, 며칠 뒤 철기 이범석 장군의 휘하로 미군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합니다. 처음엔 둘러싸고 위협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던 일본군은 끝내 총을 내렸고, 그날 밤 일본군 장교가 자진해서 술상을 들고 광복군의 숙소로 찾아왔다고 합니다. 술 한 잔 마신 이범석이 일본군 장교에게 호기롭게 “어디 너희 군가 한번 불러봐라”고 하자 그 장교는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일본 군가를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①은 자신이 패했거나 상대방에 비해 약한 형세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필요 이상으로 공손하거나 비굴해지는 일본인 특유의 행동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기록은 ②와 ③입니다. 먼저 ②를 보죠. 이것은 유성룡이 체직(遞職)돼 영의정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맑은 물을 떠 놓고 스스로를 경계했다는 내용입니다. 남인 유성룡이 북인들의 정치적 공격을 받아 물러났다는 것은 조정에 남은 이순신의 후원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정치 역학상 벼랑 끝에 놓인 형국이었죠. 작수(酌水)라는 것은 맑은 물을 떠 놓고 청렴을 다진다는 의미인데, ‘수서(隋書)’에 ‘조궤(趙軌)가 임기가 만료되자 맑은 물을 떠 놓고[酌水] 전별했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유성룡의 낙마 소식을 들은 뒤 심지를 굳건히 다진 것입니다. 요즘 말로는 ‘멘탈강화’ 정도가 되겠군요.
그리고 이제 ③번입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당시의 상황이 담긴 결정적인 기록.
“(이순신이 노량해전) 당일 직접 돌과 화살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진두지휘하는 것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으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부장들이 선봉에 서지 말라고 만류했다’는 것은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이순신은 1592년 5월 사천해전에서도 적군의 탄환에 부상을 당한 일이 있지만, 노량해전 당시의 상황은 부하들이 보기에도 대단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이순신의 배가 선두에 섰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에서 이순신은 결코 전사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음 전투를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노량해전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이전 전투처럼 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퇴각하는 적을 최대한 격멸해, 적어도 당대와 그 후대까지는, 다시 바다를 건너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은 지휘관인 자신의 안위(安危)는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충분히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서 지휘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일부러’ 맨 앞에서, 다시 말해 적의 총탄이 닿을 수 있는 사정거리 내에 들어가는 것을 무릅쓰고 전투를 지휘했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어떤 멍청한 일본인은 ‘이순신이 불필요하게 퇴각하는 일본군을 뒤쫓다 자신도 전사한 게 아니냐’고 비판하는데, 한마디로 노량해전의 의미와 전쟁의 전후 맥락, 당시 이순신 장군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수준낮은 단견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노량해전 하루 전인 11월 18일 자정, 이순신은 배 위에서 이렇게 하늘에 빌었습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卽無憾).” 새로 밝혀진 기록에 비춰볼 때,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깊게 탄식하며 노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말이 쉽지, 보통 사람이라면 행여 정말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을 실제로 수행했습니다. 노량해전은 조선군이 전선 4척 침몰, 전사자 300여명의 피해를 입은 데 비해 일본군은 200여 척이 침몰되고 100여 척이 나포됐으며 병력 1만5000명~2만명이 전사한 조선 수군의 대승(大勝)으로 끝났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의 몸을 내던져 싸웠다는 것은, 한발 더 나아가 ‘그렇다면 정말 죽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낳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족히 원고지 30매 정도 분량은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더 이상의 해석은 그만두겠습니다. 무고를 당해 죄인의 신분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이순신이 가까스로 풀려나 복직됐으나 임금이 끝내 자신을 죽일 것을 알았고, 전쟁이 끝나더라도 필경 비관적인 결말을 맞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던 것이 아닐까?… 이런 것은 모두 역사에서 부질없는 가정(假定)일 테니까요.
그런데 노승석 소장은 제게 또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새로 밝혀진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웬일인지 문화재청도 이것에 대해선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기록입니까?”
“서애 유성룡과 이순신 장군은 병을 앓을 때 대단히 전문적인 약 처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처방을 받은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이번 기록에서 그 실마리가 드러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돌발史전’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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