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6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 김성수 주교 헌정문집 출판기념회에서 윤형주씨가 히트곡 '우리들의 이야기'를 직접 부르고 있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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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지난 6일 오후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선 윤형주(75)씨의 노래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성공회의 큰어른인 김성수(92) 주교에 대한 헌정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 출판기념 북 콘서트 자리였습니다. 이날 1시간 넘게 진행된 잔치에서 오간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부끄럽습니다”(김 주교) “따뜻함과 인자함”(참석자들). 지면 기사로도 썼지만 ‘다큐’로 시작해 ‘세시봉 콘서트’로 이어진 그날의 온기를 온전히 전해드리기엔 미진했던 것 같아 다시 소개합니다.

김 주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입니다. 강화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김 주교는 일찍이 발달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알려온 성직자입니다. 1970년대에 이미 성베드로학교 교장을 지냈고, 2000년에는 고향 땅을 기증해 발달장애인 일터 ‘우리마을’을 설립해 ‘촌장’을 자임하며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발달장애인들의 노후를 위한 시설 ‘시몬의 집’도 준비하고 계시지요. 그래서인지 김 주교와 인연이 있는 필진 93명이 기꺼이 글을 썼지요. 책을 읽으면서 좀 놀랐습니다. 93명이 의례적이지 않은 각자 다른 기억, 그것도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날 서울주교좌성당엔 준비된 240여석이 거의 다 찼습니다. 두번째 줄엔 강화도 ‘이웃사촌’인 전등사 주지 스님도 참석했지요. 맨 앞줄에 앉아 계시던 김성수 주교 부부는 단상에 오르는 데 1~2분 정도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고령이라 걸음이 불편하셨지요. 김 주교 부부가 천천히 걸어나오는 동안 참석자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김 주교는 “걸음이 느려 죄송하다”며 “이 책에 93명이 글을 써주셨는데, 제가 우리 나이로 아흔 셋이라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잘 안 들린다”고도 했습니다. 청력(聽力) 외에는 92세라는 연세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날 김 주교는 꼿꼿한 자세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가 준비한 출판기념회 인사말 원고. 손글씨로 '부탁 말씀. 칭찬보다 책선해주는 벗이 필요합니다'라고 적었다. /김한수 기자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이경호 주교는 “김 주교님의 삶은 교회와 사회에서 기억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모습”이라며 “1년 전 기념사업회를 꾸려 첫 작업이 헌정문집 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큐도 거의 완성단계로 편집 중인데 여러분들이 마음을 모아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어서 김 주교는 인사말로 ‘행복, 불행’을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도 많은 이에게 칭찬 받은 사람은 불행하다 했는데 저는 몹시 불행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칭찬보다 책선(責善)을 해주셔야 내 여생이 평안할 거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김수환 추기경이 떠올랐습니다. 김 추기경은 늘그막에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 등이 “시대에 뒤처진 분”이라고 비난했을 때 “감사하다”고 했거든요. 김 추기경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이미 칭찬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나(하느님)에게 들을 칭찬은 없다’고 하실 것 같아 걱정했다”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김성수 주교 헌정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 표지.

토크 콘서트는 이정호 신부,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와 ‘세시봉’ 윤형주·윤여정씨가 연사로 나와 김 주교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정호 신부는 따끔하게 혼난 에피소드를 전했습니다. 신학생 시절 ‘교단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해병대 복장(이 신부는 해병대 출신입니다)을 입고 성당 구내에서 유인물을 돌렸다가 김 주교에게 사무실로 연행(?)됐답니다. 그때 들을 말씀은 “신학생이 이러면 안 된다. 이 길은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답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사제가 된 이 신부는 김 주교의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경기도 마석의 한센인 마을로 발령 받았답니다. 당시 딸이 세 살이었다지요. 이 신부는 “솔직히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 주교의 ‘약한 사람 거들기’ 정신을 따라 23년을 한센인,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백경학 상임이사는 ‘앵벌이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김 주교를 푸르메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모시고 대기업을 찾아 재활병원 설립 지원을 호소했답니다. 그러나 반응은 미지근했다지요. 면담 후 실망한 그에게 김 주교는 “우리 일은 열 번 전화하면 한 번 통화연결되고, 열 번 통화하면 한 번 만날 수 있다”며 “그래도 마음 따뜻한 분들의 마음은 식지 않아요”라고 위로했답니다. “거절 당할 때마다 화가 나서 맞장구치다보면 둘 다 못난이 된다”고도 하셨다네요.

김성수 주교는 발달장애인 일터 '우리마을'에 이어 퇴직한 발달장애인 시설인 '시몬의 집'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일 열린 후원음악회 초대장. /우리마을 제공

인간적인 모습은 ‘세시봉’ 멤버들과의 대화에서 두드러졌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깔끔하고 이지적 면모를 보여준 윤여정씨는 이날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윤씨는 행사가 시작된 이후부터 계속 펑펑 울었습니다. 순서가 돼 단상에 올라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날 약간 날씨가 차가웠는데 윤씨가 코트를 벗고 스웨터 차림으로 단상에 앉자 김 주교는 주변에 “코트를 입혀주세요. 감기 들면 안 된다”고 하자 윤 씨는 “저, 주교님보다 어려요”라며 그제서야 울음을 멈췄습니다. 이어 “저는 김 주교님 ‘양딸’” “오래 못 뵀어요”라며 “살아계셔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더니 “내년까지 살아계셔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내년까지”라는 윤씨의 말에 김 주교 부부와 사회를 보던 방송인 이금희씨 그리고 참석자 모두 폭소를 터뜨렸지요. 김 주교는 “윤여정씨가 개성 사람인데 피란민이다. 6·25때 어머니와 딸 셋만 피란내려왔다”며 인연을 소개했지요. 그래서 수양딸처럼 지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과 달리 윤씨에게는 ‘교회 나오라’고 권했던 모양입니다. 윤씨는 “저는 완강히 거절했어요.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이혼하면서) 만든 교회라 안 나간다고요”라면서도 “김 주교님을 보면서 ‘종교, 신앙이란 이런 것인가’라고 느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윤형주씨는 외롭던 1960년대말 김 주교의 품을 파고든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1960년대말 김 주교님이 인천교회 계실 때 총각 신부님의 집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가 쳐들어갔습니다. 김 주교님은 항상 사제관을 내주시고 냉장고도 미리 채워놓으셨습니다.” 밤새 노래하고 떠들다 잠들어 이튿날 예배엔 ‘한 놈도’ 참석하지 않아도 아무 말씀이 없었답니다. 윤씨는 “화를 안 내고 늘 웃으시니 우리는 좋아서 그러신 줄 알았다”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는 참 양심도 없었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윤형주씨는 “김 주교님은 노래 신청도 한 적 없으신데 오늘은 노래 선물 드리겠다”며 기타를 연주하며 ‘웃음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로 시작하는 히트곡 ‘우리들의 이야기’를 불렀습니다. 노래 뒤에도 윤여정씨는 “주교님 늙은 것도, 저 늙은 것도 속상하고 슬퍼요. 오래 사세요”라고 말했고 김 주교는 “너나 오래 살아라”며 웃었습니다. 김 주교는 행사 말미에 “교회는 외로운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며 “쓸쓸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예수님 말씀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간절히 소원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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