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 기자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고문인 이영일(84·사진) 전 국회의원은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때 4·19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다. 5·16 이후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좌경 운동권으로 몰려 서울교도소에 수감됐다. 거기서 만난 혁신계 인사들은 광복 직후 이른바 ‘소남한단정노선(小南韓單政路線)’을 비판했다. 이승만이 전 민족의 통일 염원을 외면하고 ‘작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분단의 비극이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통일원 대변인과 통일연수소장을 거쳐 11·12·15대 국회의원, 한중문화협회 총재와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를 지냈다. 그러는 동안 ‘소남한단정 비판론’이 북한 심리전의 핵심이며, 한국 사회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전 의원은 최근 낸 저서 ‘건국사 재인식’(동문선)에서 ‘소남한단정 비판론’의 허구를 짚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분단을 가져왔다는 논리는 가짜라는 것이다.

이 전 의원은 본지 인터뷰에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은 부동항(不凍港) 확보를 위한 소련의 영토적 야심이 초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대한민국 건국 2년 전에 북한에는 소련의 위성 정권이 수립됐습니다.” 1946년 2월 세워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했고 화폐를 발행했으며 군대를 창설했을 뿐 아니라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분단을 고착화한 것은 북한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남한은 어땠나? “대한민국은 신생 민주국가가 탄생할 때 거쳐야 하는 모든 절차와 산고(産苦)를 겪었습니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에 의해 출범한 국회가 헌법을 만들고 그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해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죠. 38선을 막고 한반도 전역의 총선거를 방해한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이 전 의원은 책 집필을 위해 제헌국회 속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국회의원을 지낸 제가 봐도 대단히 수준 높은 논의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제, 이원집정제의 장단점을 논의하고 항일독립운동을 계승하려는 진지한 토론 속에서 의견 대립과 충돌을 극복하며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만들었다. 당시 소련 위성국이었던 동유럽 국가들과 판박이인 헌법을 만든 북한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그는 “건국 초 농지 개혁의 성공이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북한은 농민들이 토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가져 사실상 김일성이라는 대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농지 개혁은 자작지(自作地) 비율을 1945년 총 경지면적의 35%에서 1951년 96%로 늘려 자작농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발전의 주체가 민족이 아닌 국가였고, 주권을 국민에 둔 것이 대한민국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