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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 의사의 의거를 다룬 최근 개봉 영화 ‘영웅’에서 관객을 크게 감동케 한 대목은 결말에서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1862~1927) 여사가 등장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조 여사는 감옥에 있는 아들 안중근에게 한글로 쓴 편지를 전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를 위해 죽으라”고 격려하며 수의(壽衣)를 전해 줍니다. 배우 나문희의 열연과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로 시작하는 뮤지컬 넘버(삽입곡)가 이 장면을 더욱 비장하게 만듭니다.
문장 순서와 일부 표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그 동안 여러 서적과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진 것입니다. 바로 아래의 ⓐ죠.(이제부터 자료를 ‘ⓐ’와 ‘ⓑ’로 나눠 구분하겠습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은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내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현재 대다수 한국인들은 안중근의 모친이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전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 다른 자료에서 본 조마리아의 전언(傳言)은 상당히 결이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다시 만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는 이후 신묘(神妙)하게 형(刑)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너라. 너가 형을 받을 때 빌렘 신부님이 너를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가서 너 대신 참회를 올릴 것이니, 너는 그때 신부님의 인도 아래 우리 교회 법도에 따라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거라.”
ⓑ는 ⓐ의 맨 끝부분 문장으로 시작하면서도 ⓐ에 나왔던 그 전까지의 모든 얘기가 빠져 있는 반면, 상당히 읽기 불편한 뜻밖의 내용이 추가돼 있습니다. ⓐ는 ‘너는 대의에 따라 장한 일을 했으니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내용이지만, ⓑ는 ‘너는 현세에서 살인이라는 죄를 지었으니 신부님이 너 대신 참회할 것이고 너는 그에 따라 합당한 형벌을 받고 죽은 뒤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나라’고 꾸짖는 내용입니다. 특히 ‘죄악’이라는 단어를 보고 눈을 의심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두 자료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 ‘편지’라고 알려진 ⓐ의 실체와 출처는 무척 모호했습니다. 2016년 이 편지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실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언제 어느 경로로 전해진 것인지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3월 7일 인터넷 매체 ‘뉴스톱’에 뜻밖의 글이 올라옵니다. 이슬람 전문가인 김동문씨가 쓴 기사입니다. 편지 ⓐ가 처음 등장한 자료는 일본 다이린지(大林寺)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이 써서 1994년 1월 출간한 책 ‘내 마음의 안중근(わが心の安重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온라인과 일상에서 회람되는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일본인 사이토 타이켄 주지스님을 통해 유일하게 전해지는 구설(口說)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이토는 무슨 근거로 그런 ‘편지’의 내용을 책에 쓴 것일까. 얼마 전 김훈 소설 ‘하얼빈’이 안중근을 왜곡했다며 논문을 써서 비판한(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11/14/DQTJVQ5LINAB5E5Q25B2BHCFAA/) 학계의 안중근 전문가이자 한국근현대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마침 영화 ‘영웅’을 본 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조마리아의 편지’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역사비평’에 투고했다고 했습니다.
논문 제목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입니다. 조마리아 ‘편지’의 진위 문제에 대한 학계의 첫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미발표 논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조마리아 세 차례 ‘전언(傳言)’의 실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일은 1909년 10월 26일이었습니다.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안중근을 처음으로 면회한 날짜는 12월 23일이었고, 여기서 어머니 조마리아의 ‘전언’을 전달했습니다. 이 면회 광경은 12월 24일자 오사카매일신보가 처음 보도했고, 이 일본어 기사를 번역해 28일 황성신문, 29일 대한매일신보가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형제간에 대면할 때 막내 안공근이 실성통곡하니, 담대한 형 안중근도 돌연 피가 가슴 가득 차오르는 듯 상기된 표정을 보였으나, 조금 지나 삼형제가 억지로 정신을 수습하였다. 두 동생이 어머니가 보낸 십자가를 꺼내 형 안중근의 눈 위에 받들어 모시고는 어머님의 <전언>이라며…”
두 동생은 분명 어머니가 쓴 ‘편지’를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전언, 즉 어머니 조마리아의 말을 형 안중근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조마리아의 전언은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의 내용이었습니다. 현세에서 다시 만나길 원하지 않으니, 너는 형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돼 세상에 다시 나오라는. 그리고 신부님이 대신 참회를 올릴 것이라는.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이 놀라거나 실망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맹세코 교회의 법도에 의거하여 신도(信徒)의 자격과 신자(臣子)의 도리에 추태를 보이지 않고 최후를 마칠 터이니, 어머님은 안심하옵소서”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조마리아의 두 번째 ‘전언’은 해가 바뀐 1910년 2월 1일에 있었다는 것이 미주 신한민보의 같은 해 3월 10일자 보도입니다. 도진순 교수가 최근 찾아낸 것이죠.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은 뤼순지방법원으로부터 공판의 변호를 거부당한 뒤 안중근을 면회해 조마리아의 이런 말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국가를 위하야 이 지경에 이르렀슨즉 죽더라도 영광이어니와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으니 정리(定離·헤어지기로 정해져 있음)에야 어찌할까.” 첫 번째 전언에서 말했듯 아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일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음은 이해하고 있고,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전언은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기 하루 전인 2월 13일 다시 면회를 온 두 동생이 전한 어머니의 말로, 같은 날 만주일일신문에 실렸습니다. “결국 사형 언도를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名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빨리 천국의 하느님 곁으로 가도록 하라.” 기사는 ‘당찬 부모의 마음에 검찰관도 암루(暗淚)에 목이 메었다’고 썼습니다. 여기서 ‘명문’이란 전통적인 양반 명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황해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를 급격히 늘리는 데 공헌한 ‘가톨릭 명문’이라는 의미라고 도진순 교수는 해석합니다. 역시 처음의 전언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속죄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조마리아의 ‘전언’은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편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졌다’ ‘대의에 죽는 것이 효도다’ ‘옳은 일’ ‘웃음거리’ ‘불효’ 등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효(孝)’나 ‘의(義)’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조마리아가 아들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네, 어디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전언’만 있었을 뿐 ‘편지’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편지가 있었다’는 얘기는 언제 출현하게 되는 것일까요.
◇1차 조작: 사이토 다이켄 ‘내 마음의 안중근’
도진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안중근 의거 당시부터 조마리아에 대한 애국적 추앙이 있었으나 위에서 언급된 ‘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2010년 전후다. 그 원조를 추적해 올라가면…”
앞서 말했던 책, 바로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다이린지의 주지인 사이토 다이켄의 그 저서, 1994년 출간한 ‘내 마음의 안중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이토는 도호쿠(東北)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 기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가 쓴 ‘내 마음의 안중근’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본인 간수였다는 지바 도시치(千葉十七·1885~1934)와 안중근의 인연을 중심으로 쓴 책입니다. 그러나 사이토 주지는 1935년생이니 지바와 만나 증언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의 신빙성에는 당연히 의문이 있습니다. 더구나 조마리아의 전언이 안중근 사형 선고 ‘이후’에 이뤄진 것이라는 잘못된 서술과 함께 이 전언을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공소 같은 것 하지 말고 바로 형을 받아라. 너는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의거를 행한 것이다. 공소를 하면 생명은 길어지겠지만 큰 수치가 된다. 만약 네가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공소하려 한다면, 이 어미의 교육은 대체 뭐였는가 하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 내용은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던 것입니다. ‘의거’ ‘불효’ ‘웃음거리’처럼 원래 조마리아의 전언에는 없고 더 나중에 나온 ‘편지’ⓐ에만 있는 말들이 여기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빨리 형을 받으라’는 것의 이유가 처음 전언처럼 ‘현세의 죄를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거를 행한 것이기 때문’으로 의미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조작이었다고 도진순 교수는 평가합니다. 도 교수는 2010년 5월 22일 일본 다이린지에서 사이토를 만나 책 내용의 의문점에 대해 물어봤는데, 사이토는 한참 침묵한 뒤 자리를 떠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와 책 내용 일부를 자신이 조작했음을 시인한 뒤 서둘러 인터뷰를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전언’ 부분에 대한 해명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이토가 조작을 한 것이 맞는다면,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도진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이토는 다이린지에 안중근 휘호 ‘위국헌신’ 유묵비를 세웠습니다. 책을 발간한 직후 다이린지는 안중근과 한일 교류의 상징으로 부상했죠. 한국인의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안중근 책을 쓰면서 이야기를 과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조작·윤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윤색: 한국어판 ‘내 마음의 안중근’
그런데 이 책이 2002년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원문에는 없는 내용들이 추가됐습니다. 해당 부분의 한국어 번역을 보죠. 번호는 도 교수가 달아놓은 것입니다.
“①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②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은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이렇다 말할 수 있으리…”
사이토의 책을 번역하며 ①에서는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원문에 없는 내용이 추가됐습니다. 여기에 1910년 2월 1일 신한민보에 실린 두 번째 전언의 내용인 ②를 새로 삽입해 ‘국가를 위한 일을 한 것이니 공소(항소)하지 말라’는 문맥을 만들었습니다.
◇'편지’ⓐ의 최종분석
이제 다시 현재 널리 유포된 ‘편지’ⓐ의 실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도진순 교수의 논문을 토대로 제가 다시 번호를 매겨 분석한 것입니다.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이 1994년 이후에 덧붙여진 것입니다.
<①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 될 것이다.
②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③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④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은 구걸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내 이 옷을 입고 가거라.
⑤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여기서 조마리아의 세 차례 전언 중에 실제로 있었다고 여길 근거가 있는 말은 ③(1910년 2월 1일 2차 전언)과 ⑤(1909년 12월 23일 1차 전언) 뿐입니다. 그중 ⑤에서는 ‘형을 받고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으라’ ‘신부님이 대신 참회할 것이다’라는 말이 삭제됐습니다. 나머지 ①②④는 실제로 조마리아가 한 말이 아니라 모두 1994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①은 1994년 사이토의 책에서 처음 나온 내용, ②는 2002년 한국어 번역본에서 처음 나온 내용, ④는 그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추가된 내용입니다.
이렇게 허구와 실제의 자료를 뒤섞고 짜깁기한 자료, 조작과 윤색으로 만들어진 말이 실제 있었던 전언의 날짜(1909년 12월 23일, 1910년 2월 1일과 2월 13일)를 모두 뛰어넘어 안중근의 사형 선고일인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어머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인 것처럼 둔갑했던 것입니다.
◇'수의’는 과연 어머니가 지었는가?
이 조작된 ‘편지’에는 “여기에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라는 말이 삽입됩니다. 뮤지컬과 영화 ‘영웅’에선 어머니가 지어 준 수의를 입고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의 모습이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제와는 달랐습니다. 안중근의 순국일은 1910년 3월 26일이었는데, 안중근은 3월 8~11일 빌렘 신부를 만나고 난 뒤에야 ‘내 의복은 피가 묻어 더러워졌으니 조선풍의 흰 옷으로 빨리 바꿔 입고 싶다’며 수의를 요청했습니다. 2월 14일 이전 어머니의 ‘전언’에서 ‘수의를 지어 보낸다’는 말은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안중근은 수의를 어떻게 구했던 것일까요. 3월 24일자 만주일일신보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안중근이 주문한 흰색 한복은 2~3일 전 뤼순의 객잔에 머물고 있는 두 동생 앞으로 보내져 온 가격이 56원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 한다.”
어머니 조마리아가 수의를 지어 준 것이 아니라, 아들의 요청에 따라 56원을 들여 옷가게에서 수의를 주문 구입한 뒤 안중근에게 전달했던 것입니다.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이후 숱한 한국인들에게 의사(義士)로 칭송된 아들에게 정작 어머니 조마리아는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던 것일까요.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다음 세상에서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오너라”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어머니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조마리아 역시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첫 번째 전언이 안중근 앞에서 십자고상을 앞세운 엄숙한 의례를 통해 전달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교리상 남을 죽여 십계명을 위반한 자는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성경 원리에 따라 죽음으로 속죄해야 한다는 종교적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마리아의 입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것이며, 결코 일제의 판결이나 식민 정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도진순 교수는 말합니다. 조마리아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했으며, 아들의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 “한국의 수십만 생명을 장차 무엇으로 대신하려느냐”고 일본 재판정을 향해 분노했습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후원자이자 대모(代母)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됩니다.
‘조마리아 편지’의 조작은 사실의 왜곡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 조마리아와 아들 안중근의 중대한 입장 차이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고 도진순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문제는 항일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으며, 조마리아의 입장은 결국 안중근이 감옥에서 도달한 내면의 최종 지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자의 중요한 이견(異見)을 직시해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이해하고 계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작된 ‘조마리아 편지’의 영향은...
이렇게 왜곡된 ‘조마리아 편지’가 미친 영향은 컸습니다. 최근 TV프로그램에서 이 ‘편지’가 진짜인 것처럼 소개된 예를 몇 가지 들어보죠.
2013년 5월 11일 MBC ‘무한도전’.
2014년 2월 13일 JTBC ‘썰전’.
2015년 11월 17일 EBS컬처 ‘책밖역사: 안중근의 수의’.
2016년 3월 20일 KBS2 ‘해피선데이-1박 2일’.
2019년 2월 25일 tvN ‘문제적 남자’.
2019년 3월 1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2023년 1월 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조작된 ‘편지’ⓐ 대신 조마리아의 첫 번째 전언 내용, 즉 전언ⓑ의 앞부분을 잘 소개했지만, 여전히 이것이 ‘편지’였다는 오류에선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꼬꼬무’의 제작진은 최소한 ⓐ가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진순 교수는 “사료의 조작이나 창작이 지극한 호의에 의한 선양이나 선의에 의해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994년경 뿌려진 조작의 씨앗이 21세기에 들어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윤색되고 전방위로 확대되어, 이제는 일정한 병리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씨를 뿌린 사람과 더불어 대중들의 광범위한 ‘애국주의’가 배양의 온상이 되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논문을 끝맺습니다.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들어내고 바로잡기 위해서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 관련 단체의 한 인사가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미화하지 않아도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다.”
‘내 마음의 안중근’이 출간된 1994년 이전에도 대한민국에서 안중근은 의사(義士)였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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