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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30년 전만 해도 경주나 해운대로 수학여행을 가면 기념품을 파는 아주머니들과 여러 번 마주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온갖 시(詩)를 조잡하게 적어놓은 열쇠고리나 책받침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죠. 그런데 그 ‘시’ 중에는 유독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이런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장유(長幼)를 불문하고, 아마도 이 시구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한국인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사실 푸시킨이 누구인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불행했던 근현대사의 역경을 거치면서 이 ‘슬픔을 속으로 삭이면서 미래를 염원하는 선언적인’ 시구는 한(恨)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마치 숙취 다음날의 꿀물이 위장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겠죠.
자장면과 화투에서부터 PC방에 이르는 그 면면한 ‘한국 정서에 들어맞는 수입품’들의 계보에 이 시는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공서, 이발소, 복덕방, 여관까지, 액자로 걸려있었던 곳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해도, 장차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두고 보자’는 말을 속으로 삼켜버린 사람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와 같은 효과를 낳은 고사(故事)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중국 한(漢)나라 초의 무장 한신(韓信·?~기원전 196)의 이야기입니다.
한신이 누구인가요. 치욕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버렸던 사람. 수모의 늪에 온 몸을 의탁했던 인물.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 같은 모든 고사성어들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몸뚱아리 하나로 증명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사마천의 ‘사기(史記)’중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이 한신 스토리의 원전입니다. ‘처음에 포의(布衣)를 입고 있을 때는 가난하고 행적이 없었으므로 추천을 받아서 관리로 뽑히지도 못했고, 또한 장사를 해서 생계를 다스릴 능력도 없었으므로, 항상 남을 따라다니며 기식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그렇습니다. 젊은 한신은 백수였습니다. 취직도 안 되는데 고시공부를 할 능력도 없고, 장사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집에 돈이 없으니 ‘귀족백수’는 꿈일 뿐이었습니다. 항상 여기저기 빈대노릇을 하니 사람들이 좋아할 턱이 없었습니다. 말단 공무원인 친구에게 붙어서 기식했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친구의 아내가 참다못해 드디어 새벽에 밥을 지어 침상 위에서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식사 때가 돼 한신이 가보니 밥을 차려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한신은 그 뜻을 알고 화를 벌컥 낸 뒤 그 집에서 나와버렸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얘기입니다. 말단 공무원이라니, 신분 확실한데 박봉이면 어떠랴! 벤처기업가보다 공무원이 빈대붙기 좋다는 건 백수들의 기본상식이며, 예나 지금이나 이런 유형의 인간들을 쫓아내는 건 안주인의 역할입니다. “저 인간 언제까지 여기 눌러앉아 있을 거냐고!”
한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본 것은 빈 밥그릇뿐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지연의’에도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조조의 책사 순욱이 조조와의 사이가 틀어지자 조조는 그에게 그릇 하나를 보내는데, 그 그릇은 비어 있었죠. 순욱은 ‘아, 이건 밥을 먹지 말라는 뜻이니까 죽으라는 말이구나’라 깨닫고 자결을 택합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종종 암시를 주곤 했습니다. “넌 더 이상 밥 먹을 자격 없다!”
그런데 한신은 오히려 화를 냈던 것입니다. “내가 누군줄 알고 이렇게 대하나!” 비록 지금은 의탁할 데 없어 몸을 굽히고는 있지만 가슴속에 큰 경륜을 품고 있는 나에게 이런 대우를 하다니! 그래 두고 보자! 어찌 연작(燕雀)이 대붕(大鵬)의 뜻을 알랴? 그러곤 ‘셰인’의 알란 라드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표표히 떠나갔을 것입니다.
‘한신이 성 밑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여러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여인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보고 밥을 주어 먹게 했다. 마침내 밥을 먹여가면서 빨래한 지 수십 일이 됐다.’ 이때 한신이 낚시질을 했던 강은 ‘귤이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그 유명한 회수(淮水)였습니다. 왜 낛시질을 하고 있던 것일까요. 배가 고파서 고기라도 잡아먹으려 했던 걸까요?
예전에 백수로 지내던 한 사람이 이 부분에서 이런 의견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 뒤 남들 같으면 엄청 열 받아서 막노동이나 호떡집 장사라도 했을 법한데 한신은 꿋꿋하게 빈둥거리며 하릴없이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강태공을 비롯해 고대의 수많은 백수들이 유독 낚시를 즐겼던 것은 오늘날처럼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는 만화가게나 비디오 대여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깁니다.
‘빨래하는 여인’, 즉 표모(漂母)의 연령은 정사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허우대가 멀쩡한 백수 청년이 파장 무렵 역전을 지나가면 어묵 장수 아주머니가 “총각! 여기 남은 음식이라도 좀 먹어”라고 불러 세우는 모습 말입니다. 한신은 “내 반드시 아주머니께 크게 보답하겠습니다”라 했으나 표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장부가 스스로 벌어먹지 못하기에 내가 왕손(王孫)을 불쌍히 여겨 밥을 줬을 뿐인데, 어찌 보상을 바라겠소!”
여기서 나오는 ‘왕손’이란 말 때문에 사실은 한신이 사실은 왕족의 후예였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사기’의 주석인 색은(索隱)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지 얼마 안 되던 때다. 그래서 망한 나라의 귀족들이 무더기로 몰락해서 길바닥에 쏟아져나왔다. 그러다보니 ‘왕손’이니 ‘공자(公子)’니 하는 말이 일반적인 존칭어가 돼 버렸다.” IMF 이후엔 누구나 ‘사장님’이라 불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한신의 말은 아무래도 ‘아줌마 나중에 성공하면 외상값 갚을게요’ 정도의 어감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표모의 분노에 찬 일갈. 한신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이런 절개어린 표모의 장한 뜻이 서려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런 말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주는 밥이나 먹어 이놈아.”
회음후열전은 백수 시절 한신의 마지막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한신이 살던 회음의 천민들 중 젊은 사람들 가운데 한신을 업신여기는 자가 말했습니다. “네놈이 비록 키 크고 도검(刀劍)을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속으로는 겁이 많을 뿐이다.” 여러 무리가 그를 모욕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한신. 죽으려거든 나를 찔러 봐. 죽기 싫으면 내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 가.”
드디어 동네 깡패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동네 주민들이 ‘저 멀쩡한 허우대로 빈둥거리는 녀석 좀 혼내줘라’고 사주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깡패의 저 이죽거리는 말투는 어딘가 익숙합니다. 마치 군대에서 실컷 모욕해 놓고 ‘열받지? 자 열받으면 한 대 쳐라 쳐’라며 뺨을 내밀던 얄미운 고참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원문을 살펴보면 한신은 일단 깡패들보다 체구가 훨씬 컸던데다가 무기를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주로 도축업자[屠]들. 그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어 봐야 기껏 도살용 식칼. 반면 그가 지니고 있던 것은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長劍). 깡패들이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서 그를 둘러싼 것으로 보아 장소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저자거리였을 것입니다.
‘찌르면 죽는다’는 협박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지나가던 관리도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을 터. 진(秦)은 냉혹한 엄벌혹형(嚴罰酷刑)의 법치주의 국가였습니다. 칼을 휘둘러 몇 놈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곧 관아에 끌려갈 것이고, 운좋게 도주한다 해도 자신은 이미 수배자가 됩니다. 비록 막판엔 짜게 굴었지만 공무원 친구 녀석은 어찌될 것이며, 잘못하면 빨래하던 아주머니에게까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신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쉴새없이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 장면을 이런 간결하면서도 긴장감어린 단 여섯 글자의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에 한신은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어시신숙시지·於是信孰視之).’
(여기서 孰은 오늘날 한자의 熟과 뜻이 통하는 글자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이 여섯 글자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20년 사마천의 ‘사기’를 문학적으로 분석한 책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한다’를 낸 고전학자 최경열씨는 이것을 “사마천이 의도적으로 끼워놓은 한 구절”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인내, 내면적 성장의 깊이를 함축한 문장”이라는 것이죠.
어쩔 것인가. 내 비록 지금은 훗날을 위해서 큰 뜻을 흉중에 감춰두고 있지만, 대장부로서 어찌 이런 치욕을 감수할 것인가. 칼을 버리고 맨손으로 대적한다? 승산이 없는 일.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저 할 일없이 놀고먹는 한량 녀석이 칼이라도 뽑아 드려나?” “웃기지 말라고 해.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순간, 한신은 결심합니다. 그래, 저들이 두 번 다시 나를 건드리지 않게 하는 방법, 내가 이 마을을 떠날 때까지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게 할 방법. 그 방법 뿐이야.
돌연 한신은 머리를 숙이고 깡패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갔습니다. 온 저자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깡패 여러 명이 한 사람을 괴롭힐 때 털끝만큼도 도와주지 않던 비겁한 사람들이 한신을 비겁하다고 욕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을 비겁하다고 욕하는 대중들은 정작 자신의 비겁함에는 익명성의 그늘 속에 숨어 눈을 감아버리게 마련입니다.
훗날 장군이 된 한신은 고향의 제후로 임명돼 금의환향했고, 표모를 불러 천금을 내려 그 옛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공무원 친구에게는 그보다 훨씬 적은 백전을 내리며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네는 소인배일세.” 그리고 자신이 가랑이 밑을 기었던 깡패를 찾아내 벼슬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장사(壯士)다. 나를 욕보이던 때에,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해도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고 지금의 공을 성취한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워진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의 세상, 거리 여기저기서 한신의 젊은 날을 연상케 하는 젊은이들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모욕을 참으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한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요? 버스에서 좌석에 앉은 중장년층이 젊은이들의 가방을 들어 주던 미풍도 사라진 지금, 청년들을 귀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절실해집니다. 그들 모두가 한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한신은 분명 그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고, 한신이 되지 못할 많은 청년들 역시 머지않아 사회의 주축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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