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共委·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지방 순회 중 전북 정읍을 방문한 이승만(1875~1965)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정읍 선언’(정읍 발언)은 38선 이남의 단독 정부 수립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평가됐고 좌파 학자들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이승만’이라고 공격하는 근거가 돼 왔다.
이에 대해선 꾸준한 비판이 제기됐다. 이미 19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38선 이북에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46년 2월 평양에 들어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고 화폐를 발행했으며 군대를 창설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은 이미 수립된 북한의 공산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정읍 선언은 그 정도 평가로 그칠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됐고, 통일 민주 정부의 계획이 들어 있는 역사적인 선언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
우남네트워크(상임대표 신철식)는 23일 오후 2시 30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에서 6·3 정읍 선언 77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세미나 ‘이승만의 정읍 선언과 대한민국 건국’을 연다. ‘건국의 시작과 자유민주 통일의 염원이 정읍 선언에서 시작됐다’는 취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부터 이승만은 한반도에 하나의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미·소·영·중 정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귀국 후 38선 철폐 운동을 벌이는 한편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으로 구성된 남북 지도자 모임을 열어 12월까지 중앙정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은 인구 비례로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이미 북한에 인민 정부를 세운 소련은 남한까지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나왔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미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소련은 친소(親蘇) 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은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뒤 소련을 압박해 통일 정부를 세우는 방안이었다. 결국 정읍 선언은 단독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통일 정부가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는 것이다(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 따라서 정읍 선언을 한반도 분열의 출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새로운 통일 선언’으로 평가돼야 한다.
정읍 선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기 위해 ‘선(先)임시정부 수립, 후(後)민족 통일 달성이라는 단계적인 통일 정부 수립론을 공표한 것이었다. 당시 한민당 등 우파 정당과 우파의 대동신문, 안재홍이 사장으로 있던 중도계의 한성일보만 정읍 선언에 찬성했을 뿐 좌·우파의 정당·단체·신문은 한결같이 남한 단정론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당시의 반대 논리는 소련이 북한을 소비에트 위성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임시정부 협의체에서 반탁 단체들을 배제하려 해 미소공위가 무산을 앞두고 있던 현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다(오영섭 대한민국사연구소장). 이승만의 정읍 선언은 냉혹한 국제 정세를 인식했던 식견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분석이다. 정읍 선언 77주년 기념 행사는 6월 3일 오후 1시 정읍YMCA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