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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고대사에서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정사(正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아닌가, 그런데 그게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인가? 사대주의 사상으로 쓰여진 책 아닌가?”
저도 오래 전 청소년 시절에, 지금 표현하자면 ‘국뽕’이라 말할 수 있는 생각에 젖어 있었던 때가 잠깐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막 출간된 ‘환단고기’를 읽고 나서 저 스스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삼국사기는 사기품이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유사품이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의 역사학과에 진학하고 대학원 공부까지 할 무렵엔 뭔가 스스로 삼국사기에 대해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삼국사기의 역사관이 사대주의에 의해 씌어진 것인가의 문제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처음 사 읽었던 삼국사기는 동서문화사에서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던 두 권짜리 번역본이었습니다.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뜻밖에도 ‘신라본기’가 맨 처음에 수록돼 있었습니다. 신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으려는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삼국사기가 고구려를 정통으로 한 것이라는 일설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용을 읽어볼수록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곳곳에 수록돼 있는 김부식 자신의 사론(史論)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멸망함이 마땅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연호를 쓴 것은 잘한 일이다”… 참으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기가 막힌 말들이 많았습니다. 김부식을 ‘모화사상으로 똘똘뭉친 사대주의자’로 보는 것은 일리 있는 시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겨납니다. “그렇게 사대주의적이고 중국 중심적인 입장에서 쓴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과연 타당한 태도일까요? 물론 용어의 사용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점들이 눈에 띕니다. 중국으로의 사신은 모두 ‘조공’이었고 왕의 죽음은 모두 붕(崩)이 아니라 그보다 격이 낮은 훙(薨)입니다. 또한 철저히 신라 중심적인 서술이었으므로 신라에 불리한 내용들은 많이 빠뜨렸다는 의심도 듭니다. 열전 10권 중 3권을 김유신전으로 도배하고,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항쟁한 백제 장수 지수신을 누락시키고 당나라에 항복한 흑치상지를 열전에 넣는 등, 의혹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숱한 사론을 통해 비뚤어진 시각을 피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고, 용어를 중국 중심으로 바꾸었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납토성을 비롯한 많은 고고학적 발굴과 더 오래된 다른 기록과 합치되는 부분들은 삼국사기가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많은 기록들의 수집과 편집을 거쳐 매우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 끝에 이루어진 책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기록해 울릉도와 독도가 최소한 그때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기록한 책 역시 삼국사기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가 삼국사기를 읽을 때엔 그 ‘사대주의적인 의도’를 충분히 감지한 상태에서 제시된 기록들을 검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는 고구려의 ‘유기(留記)’와 ‘신집(新集)’도(이것은 책 이름이 아니라 그저 ‘남아있는 기록’ ‘새로 편집한 책’이란 뜻일 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서기(書記)’나 신라의 ‘국사(國史)’ 또는 고려 초의 ‘구삼국사(舊三國史)’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을 최고(最古)의 정사로 삼아야 하는 우리 역사학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숱한 왜곡으로 가득찬 허술한 기록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더 큰 오류를 낳게 될 것입니다.
둘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 책만이 존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 후의 상황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부식은 인종 23년(1145)에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했습니다. 이때는 김부식 자신에 의해 묘청의 난(1135∼36)이 진압된 이후의 일입니다. 묘청의 난(여기서 ‘亂’이란 용어가 전통적인 왕조사관에 입각한 것임은 물론입니다)이 진압됐다는 사실은 서경으로의 천도,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을 표방한 정치세력이 몰락했음을 의미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며, 일련의 낭가(郞家)사상과 자주적-고구려계승 의식을 가진 세력이 유가(儒家)사상과 사대적-신라계승 의식을 가진 세력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설령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남송(南宋)의 선진문화를 흠모하는 문벌귀족 세력이 당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대주의적 기술태도라는 것은 김부식 자신의 취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정신을 반영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각과 다르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 H. 카는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역사가를 연구하라”라고 했습니다.
셋째, 그런 사대주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시각으로 기술’했다는 행위 자체는 일정한 ‘자주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 점은 김부식 자신에게도 딜레마였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삼국의 역사 모두를 ‘본기(本紀)’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술에서 ‘본기’는 제후의 역사인 ‘세가(世家)’와는 달리 군주, 즉 왕이나 황제의 역사를 적는 카테고리입니다. 따라서 “김부식이 철저히 중국의 지방사로서 우리 역사를 보았다”는 주장은 조금 곤란합니다. 혹자는 삼국사기에 ‘세가’가 없다는 점을 들어 김부식을 공격하지만, 사실 우리의 역사에서 지방분권적인 제후국(諸侯國)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 점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이후의 역사책들은 어땠을까요? 조선 초에 씌어진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세가’란 항목에서 기술하고 있고, ‘본기’는 없습니다. 철저히 우리를 ‘제후국’으로 보았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 삼국사기의 차별성은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삼국사기를 ‘민족자주적인 입장에서 씌어진 역사서’로 볼 수 없다는 점 또한 명백하지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덕적 합리주의라는 일정한 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삼국사기’는 그것 나름으로 값어치를 가진다. 또 당시의 사대적인 환경이나 유교적 가치관이 풍미하고 있는 속에서도 자아발견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는 점이 지적되고 아울러 그곳에 드러나고 있는 강한 국가의식도 높이 살 만하다.” 걸러서 읽어야 한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02년 중국의 동북공정 뒤에는 한국고대사가 ‘이국(二國)이 아니라 ‘삼국(三國)’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