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31일 제막식을 갖고 공개된 무산 스님의 부도탑.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해수관음상 앞에 놓였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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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랑받는 ‘사리탑’이 또 있었을까.

지난 5월 31일 강원 양양 낙산사에 세워진 무산 스님 사리탑(부도탑)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6월 1일자 조선일보에 기사로 소개했습니다만 조금 더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도탑은 설악산 신흥사 조실(祖室)을 지내고 지난 2018년 입적한 무산 스님의 5주기에 맞춰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형태가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이라면 종(鐘) 모양의 석탑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역사가 오랜 사찰에 가면 고승들의 사리탑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형태가 비슷한 사리탑이 모여있곤 합니다.

물론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사리탑도 있습니다. 설치미술가 최재은씨가 설계한 해인사 성철 스님 사리탑이 대표적이지요. 구(球)와 원, 사각형 등의 기하학적 조형물로 만들어 화제가 됐습니다. 2019년말 입적한 봉암사 적명 스님의 사리탑은 돌을 깎은 4각 기둥 3개를 나란히 세운 형상입니다. 파격적인 형태의 사리탑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참배의 대상’이란 공통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5월 31일 제막식 후 무산 스님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됐다. /김한수 기자

그렇지만 이번에 공개된 무산 스님 사리탑은 참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어울림의 대상입니다. 형태는 ‘파격 중의 파격’이라 할 만 합니다. ‘사리탑+동상+시비(詩碑)+그림비(碑)’이 모두 합쳐진 형태입니다. 설치된 위치도 사찰 내 구석진 곳이 아니라 낙산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즐겨찾는 장소인 ‘해수관음’ 바로 앞입니다. 사리탑 바로 뒤로는 동해의 푸른 수평선이 보입니다. 최고의 ‘포토존’이지요.

사리탑은 스님의 파격적인 삶을 형상화했다고 할까요. 스님은 생전에 사회 저명인사부터 마을 노인회장, 염쟁이, 식당 주인, 초등학생까지 스스럼없이 대하셨지요. 백담사에 바깥에서 문을 잠그고 들어가 3개월씩 참선수행하는 공간인 무문관(無門關)을 열었고, 조계종의 선승(禪僧)이 될 스님들의 교육기관인 기본선원을 백담사에 유치해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해마을을 만들어 문인들의 집필공간도 제공했습니다. 백담사를 정신적 요람 삼아 활동했던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리는 만해축전과 만해대상을 만들어 현양사업에도 앞장섰지요. 무산 스님의 사리탑은 이런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입니다.

5월 31일 제막식에 참석한 스님들이 무산 스님 동상 주변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생전의 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만난 것처럼 보인다. /김한수 기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왼편의 무산 스님 동상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동상은 색깔이 칠해져 승복을 입은 스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무표정한 듯, 살짝 미소짓는 듯한 표정이지요. 동상 옆으로는 스님의 시 ‘파도’를 적은 시비와 그 아래에는 스님이 매직펜으로 쓱쓱 그린 컬러 그림이 새겨져있습니다. ‘파도’는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으로 불립니다. ‘밤 늦도록 책을 보다가/밤하늘을 바라보다가//먼 바다 울음소리를/홀로 듣노라면//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바람에 이는 파도란다’라는 이 시는 스님이 낙산사에 머물면서 지었습니다. 인적 끊긴 밤, 바닷가 절에 홀로 앉아 경전을 읽고 있는 스님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진 풍경이 저절로 눈 앞에 그려지는 작품입니다. 비석 글씨는 생전에 스님의 작품을 영미권에 알려온 국문학자 권영민 교수가 썼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듯 무산 스님은 속명이자 필명인 ‘오현 스님’으로 유명한 시조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백담사 만해마을 내 거처인 심우장에서 도화지에 매직펜으로 쓱쓱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 부는 소나무 숲을 그린 것 같은 그림도 있었지요. 해마다 8월이면 열리는 만해축전·만해대상 책자의 표지 그림으로도 내주셨습니다. 마음 내키면 주변에 나눠주시기도 했는데, 어느 때엔가 모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부도탑에 새겨진 그림은 색색깔의 사람들이 어깨동무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무산 스님 부도탑 안에 봉안된 작은 석탑(왼쪽)과 제막식에서 이 석탑을 봉안하는 모습. /김한수 기자

그렇다면 스님의 사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시비 윗부분을 보면 사각형으로 파인 부분이 있습니다. 덮여있는 유리 아래로 미니어처 돌탑이 놓여있습니다. 깨진 기와 조각들을 다듬어 5층으로 쌓고 맨 위엔 절구처럼 옴폭한 돌을 얹었습니다. 그 위에 스님의 유골이 놓여있습니다. 시비 안에 사리탑이 봉안된 형태이지요.

이 사리탑은 조각가 김경민씨가 상좌 스님들과 1년에 걸쳐 구상하고 제작했다고 합니다. 김 작가는 “생전에 오현 스님을 뵌 적은 없지만 작품을 읽고 여러 자료를 보면서 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자유로운 영혼과 사랑 가득한 모습을 친근하게’ 표현하려 애썼다고 합니다. 종교인이라는 엄숙함, 무거움, 권위 대신 친근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벤치’도 포인트입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편히 앉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김 작가는 시비를 기준으로 오른쪽 넓은 자리에 사람들이 앉을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막상 공개되자 동상 왼쪽 비좁은 자리가 더 인기였습니다. 스님 곁에 앉고 싶은 것이지요. 김 작가는 “작품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 아니라 방문객들이 작품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작품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며 “제막식 날부터 사람들이 줄서서 사진을 촬영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스님이 사랑받고 계시는구나’ 싶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무산 스님 동상의 찻잔 속에 누군가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뒀다. /김한수 기자

제막식이 끝나고 보니 벌써 누군가 그 찻잔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뒀더군요. 동전을 넣은 의미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넣었을 수도 있고, 그냥 재미로 넣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미 대중들이 이 작품을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벌써 사랑받는 조형물이 됐다는 것이죠. 낙산사에 새로운 명소가 탄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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