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5·16 때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44세의 박정희를 보고 ‘원래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니었죠. 그는 야전 사령관 출신도 아니었고, 전두환처럼 조직의 우두머리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습니다.”

1978년 12월 포항제철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오른쪽) 포항제철 사장과 최각규(왼쪽) 상공부 장관도 보인다. 오인환 전 장관은 박정희 리더십의 핵심을 ‘기획력’이라고 짚었다./포스코

언론인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 때 공보처 장관을 지낸 오인환(84)씨가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분석한 평전 ‘박정희의 시간들’(나남)을 냈다. 앞서 이승만과 김영삼의 평전을 낸 그는 2018년 이번 책 집필을 끝냈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출판사에서 곤란해했고,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낼 수 있었다. 오 전 장관은 “일방적 찬양이나 비판을 벗어나 공과(功過)를 냉정하게 분석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박정희의 본질은 ‘기획가’였다. 박정희는 기획력이 특출한 작전참모 출신이었고, 계획에서 실행, 사후 평가까지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큰일을 추진하면서도 작은 일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던 만기친람(萬機親覽)형 통치술을 이미 군에서 익힐 수 있었다.

오인환 전 장관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박정희의 리더십이 단계적으로 형성돼 나갔다는 것이다, 5·16 이후에야 비로소 1인자가 됐지만 혁명 주체 세력 중에서도 군 선배가 있었고, 김종필이 만든 공화당이 100% 충성하지도 않는 상황에 처했다. 박정희가 택한 것은 ‘시스템 정치’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후락의 청와대 비서실과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를 서로 경쟁·견제시키며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출중한 용인술(用人術)과 지모(智謀)를 키웠던 것이죠.”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박정희는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웠다. 매일 3시간씩 대학교수로부터 1대1 강습을 받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어 찬반토론을 경청한 뒤 결론을 내렸다. 유연한 정신자세, 겸손,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도 한몫했다. 그 결과는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탄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 뒤에는 역설적으로 이 장점들의 빛이 바랬다. 1972년 유신 선포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습 사건을 거치며 자기주도 학습은 기능을 멈췄고 특유의 자기 수정 능력도 둔화됐다는 것이다. 오 전 장관은 “기획가로서 출구전략을 만들었어야 했지만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고도성장 능력이 한계를 맞은 상황에서 경제안정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기엔 사생활의 약점으로 도덕성과 지도력의 위기를 불렀고, 용인술마저 성공하지 못했다.

오 전 장관은 자신이 평전을 쓴 세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했고, 박정희가 성장시켰으며, 김영삼이 민주화를 이룩했다”며 “이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