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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작전참모 출신의 기획가였고, 그런 사람이 1인자가 됐으며, 그 뒤 끈질긴 자기주도 학습을 통해 단계적으로 리더십을 형성해 갔다.”
어떤 의미에서든, 20세기 대한민국 현대사를 크게 바꿔놓은 사람은 5~9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1917~1979)였습니다. 도대체 그 리더십은 어떻게 이뤄졌던 것일까.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는 논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필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개 찬양 아니면 비난 일색이기 일쑤였죠.
그런데 최근 그런 연구가 나왔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한 최장수 공보처 장관의 기록을 세웠던 오인환(84)씨입니다.
그가 출간한 책은 리더십을 중심으로 쓴 평전 ‘박정희의 시간들’(나남)입니다. 오 전 장관은 이미 이승만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평전을 냈고 “이 세 사람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했고, 박정희가 성장시켰으며, 김영삼이 민주화를 이룩했다. 결국 이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박정희의 시간들’ 집필을 끝낸 것은 이미 5년 전인 2018년의 일이었는데, 시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며 출판사에서 난색을 표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적폐’로 몰리던 분위기가 컸습니다. 그 전해 박정희 탄생 100주년도 무척 조용히 넘어가던 상황이었죠.
5년 만에 출간된 책을 들고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초구 방배동 오 전 장관의 자택을 찾았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냉정하게 짚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람들은 5·16 때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44세의 박정희를 보고 ‘원래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었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니었습니다. 그는 야전 사령관 출신도 아니었고, 전두환처럼 조직의 우두머리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박정희의 본질은 ‘기획가’였습니다. 박정희는 기획력이 특출한 작전참모로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었고, 계획에서 실행, 사후평가까지 철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큰일을 추진하면서도 작은 일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던 통치술을 이미 군에서 익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획력이 마침내 쿠데타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죠. 기획이 곧 혁명이었다는 얘깁니다.
오 전 장관은 책에서 이렇게 분석합니다.
“사령관은 우선 타고나야 한다. 전쟁터를 넓게 보는 매의 눈과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맹수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황에 따르는 그때그때의 판단력과 장악력도 좋아야 한다. 군에서 예하 부대 지휘관, 참모, 참모장, 사령관의 역할을 두루 잘한 인물은 흔치 않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네 가지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해 내는 통합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기획하고 계획을 세우며 실천과정을 주도하고 일이 끝난 뒤 결과를 따져보기까지 하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한국사회에서 원하든, 원치 않았든 간에 그 같은 리더십을 단계적으로 단련시켜 간 예는 별로 없었다. 박정희는 큰일을 추진하면서도 작은 일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는 타입이었다. 균형감각이 뛰어나 한편으로 소심하고 다른 한편으로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두뇌와 재능, 담력에 노력을 보태 그 같은 통합능력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획가가 1인자로 서는 일 자체가 무척 특출한 상황인데, 1961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리더십 형성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5·16 이후에도 단계적으로 형성돼 나갔다는 것입니다. 1인자가 됐지만 혁명 주체 세력 중에서도 군 선배가 있었고, 김종필이 만든 공화당이 100% 충성하지도 않는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죠.
이 같은 상황에서 박정희가 택한 방식은 ‘시스템 정치’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전 장관이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이후락의 청와대 비서실과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를 서로 경쟁·견제시키며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출중한 용인술(用人術)과 지모(智謀)를 키웠던 것이죠.”(이 지모는 혈육에게 물려주지 못했고, 그것은 훗날 보수의 궤멸로 이어졌다고도 했습니다.)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박정희는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매일 3시간씩 대학교수로부터 1대1 강습을 받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어 찬반토론을 경청한 뒤 결론을 내렸습니다. 계획을 세우면 추진하고 나서 반드시 사후 평가를 했습니다. 유연한 정신자세, 겸손,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도 여기에 한몫했습니다. 그 결과는 단기간에 경제 성장을 이룬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는 학생들의 특징은 자기주도 학습을 잘한다는 것인데, 박정희가 이 타입이었다. 머리가 좋은 데다가 학교나 군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능력이 이 특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경제에 관한 자기주도 학습능력이 뛰어났던 것도 이 특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유연한 정신자세, 겸손,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가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18년의 긴 통치기간 동안 박정희가 과연 그런 ‘유연성’과 ‘겸손’ ‘사심 없는 태도’만 보였던 걸까요? 이 의구심, 구체적으로 말해 박정희의 모습에서 자주 보인 이중성(二重性)에 대해 오 전 장관은 이렇게 비판적으로 썼습니다.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이었던 전력 때문에 줄기차게 강력한 반공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을 완전히 불식하지 못했다. 언설은 민족주의자였으나 행동은 매판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도 반민주적인 통치반식을 보였다. 대미관계도 반미(反美), 비미(批美), 용미(用美), 친미(親美)로 변하는 등 상황에 따라 편차를 보였다. 실용적이기도 하고 기회주의적이기도 하며 변신을 자주 반복했다. 일관된 자기를 보여 주지 못한 점이 그의 큰 업적을 무색하게 했다.”
그리고 또.
앞서 짚었던 ‘리더십 성장’이 집권의 끝자락인 1979년까지 지속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탄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 박정희에게선 그 뒤로 그 같은 장점들의 빛이 바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大)기획가의 위기관리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자기주도 학습의 기능이 멈추고 박정희 특유의 자기 수정(修正) 능력이 둔화되면서 심각한 위기에 부딪히게 된다.”
이 시점은 대략 1972년 유신 선포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을 거친 때였다는 것입니다. 오 전 장관이 말했습니다. “기획가로서 출구전략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고도성장 능력이 한계를 맞은 상황에서 경제안정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박정희 개인의 문란한 사생활이 도덕성과 지도력의 위기를 불렀고, 말년엔 용인술마저 성공하지 못했다.”
‘용인술의 실패’라는 것은, 보안사령관과 수도경비사령관을 심복 중에서 발탁해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견제하는 등 권력 균형 장치를 썼던 박정희가 말년에 가서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독주를 막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10·26 직전의 상황에서 비서실장은 무능했고 경호실장은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었으며, 중앙정보부장은 권력 투쟁에 골몰했다는 것입니다.
‘문란한 사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얘기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턴이나 프랑스의 미테랑도 스캔들은 있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오 전 장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클린턴이나 미테랑은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여성을 물색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시간들’에는 처음 나온 얘기는 아닙니다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이 나옵니다. 5·16 전날 밤 거사가 노출돼 여관방에서 자포자기로 술을 마시는 박정희에게 장경순 준장이 “무슨 소리요? 갑시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그중 하나입니다. 정변이 사전 발각돼 실패했다 여기고 술에 취한 사람이 다음날 새벽 성공한 혁명의 수장으로 청와대에 나타나다니!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관에 들른 것은 거사에 참여했던 한웅진 준장이 숙소에 권총을 놓고 와 그걸 가지러 갔던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박정희의 요정 출입 문제로 청와대에서 부부싸움이 난 일화도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혁명 정신을 잊으셨어요? 여자들과 술이나 드시고”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오 전 장관은 “박정희는 기획가로서 출구전략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이죠. 1972년쯤 선진국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 여기고 물러났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이란 얘깁니다.
분명 경제 성장이 먼저 성공하면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계획이었으나 박정희는 이것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여기에는 미스터리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JP를 후계자로 삼고 양김과 대결시켰다면 분명 여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유신을 하지 않고 물러났더라면… 예를 들어 JP 같은 사람이 권력을 물려받았더라면, 그래도 중화학공업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왜 불가능했겠어요?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역사의 가정(假定)이기 때문에 더 논의하기는 무리일 것입니다.
박정희의 공(功)을 정리하자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오 전 장관이 말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삼권분립 체제를 확립해 현대국가로서의 틀을 마련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죠. 그 이면에서 지나친 경쟁사회와 천민자본주의가 심화됐다는 것은 짚어야 합니다.”
오인환 전 장관의 책은 무척 정교한 분석을 담고 있지만, 그 분석 또한 반론의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비판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시간들’은 책을 읽은 보수 진영 인사들로부터 무척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리더십에 대해 대단히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것이죠.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인 박지만씨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후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평전이라는 것이 그 후손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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