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고려 시대 문화재 ‘나전 국화넝쿨무늬 상자’가 공개되고 있다.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환수한 것이다. /김지호 기자

분홍빛 국화 무늬 곁을 파도나 영기(靈氣) 같은 넝쿨이 부드럽게 휘감는다. 잘게 오려낸 자개로 꽃무늬를 만들어 음각선을 촘촘히 그었고, C 자 모양의 금속 선으로 꽃무늬를 감싼 넝쿨 줄기를, 두 선을 꼰 금속 선으로 외곽 경계선을 드러냈다. 꽃무늬의 중심원은 1.7㎜, 꽃잎 하나의 크기는 2.5㎜. 대단히 정교한 기법이다.

‘고려의 빛’을 담은 나전칠기가 800년 만에 베일을 벗었다.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가 일본에서 환수된 것이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6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 이 유물은 그동안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한 개인 소장가의 창고에서 100년 넘게 보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에 20개도 남지 않은 고려 나전 중에서 ‘최고 수준’

‘새 고려 나전칠기’라는 말은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설레게 하기 충분하다. 보존이 쉽지 않아 국내에 현존하는 고려 나전칠기는 지금까지 단 3건, 세계를 통틀어 봐야 일본과 미국 소장품 등 20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희귀 유물이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2023년 9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통해 일본에서 환수한 고려 나전칠기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를 공개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나무와 나전·금속으로 만든 가로 33㎝, 세로 18.5㎝, 높이 19.4㎝ 크기의 상자다. 모두 4만5000개의 자개를 사용해 고려 나전칠기의 대표적 문양인 국화 넝쿨·모란 넝쿨 무늬와 연주(連珠) 무늬(점이나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해 만든 무늬)를 표현한 정교하고 화려한 작품이다. 전체 면에 자개를 사용해 770개의 국화 넝쿨 무늬를 장식했고, 천판(뚜껑 윗면) 테두리의 좁은 면에 모란 넝쿨 무늬 30개를 배치했다. 외곽에는 연주 무늬 1670개를 둘렀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영롱하게 빛나는 자개의 색감과 세밀한 문양 표현이 탁월해 고려 나전칠기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된다”며 “800년 넘게 지났지만 보존 상태가 우수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자개를 사용해 국화와 모란 무늬를 전면에 빼곡하고 규칙적으로 배치했고 ▲단선의 금속 선으로 넝쿨 줄기를 묘사했으며 ▲매우 작게 오려낸 자개에 음각 선을 그어 세부를 표현했고 ▲나전 본연의 무지개 빛깔과 광택이 살아있다는 점 등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세밀하고 귀하다” 찬사받은 고려 나전

전복·소라·조개 같은 패류의 껍데기를 갈아 얇게 가공한 것을 ‘자개’라 한다. 나전칠기란 이 자개로 무늬를 장식하고 칠을 한 공예품이다. 작게 오려낸 자개를 하나하나 붙여 꽃과 잎 문양을 장식하는 등 매우 정교한 기술과 복잡한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되기 때문에 ‘공예 기술의 집약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부터 나전칠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신라의 나전 유물로 국보 나전화문동경이 남아 있다.

고려의 나전 기술은 무척 뛰어났고, 나전칠기는 청자·불화와 함께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술공예품으로 손꼽혔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북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나전 솜씨가 세밀해 귀하다 할 수 있다(螺鈿之工細密可貴·나전지공세밀가귀)”고 했다. ‘고려사’에 조정에서 송·요 같은 외국에 보내는 선물 품목에 나전칠기가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국제적 인기를 알 수 있다.

‘나전국화넝쿨무늬상자’는 매입 전에 유물을 국내로 들여와 지난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X선 촬영 등 과학적 분석을 거쳤다. 그 결과 목재에 직물을 입히고 칠한 목심저피칠기(木心苧被漆器)임이 확인됐다. 우리 전통적인 칠기 제작 기법이 사용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