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천사' 마가레트 피사렛 간호사. 9월 29일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선종했다. /김연준 신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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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온 비보

지난 추석 연휴, 또 한 명의 은인(恩人)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가레트 피사렛(88) 간호사입니다. 동료 마리안느 스퇴거(89) 간호사와 함께 ‘소록도 천사’ ‘소록도의 어머니’ ‘할매’로 불렸던 분입니다. ‘마가레트 할매’의 선종(善終) 소식이 알려지자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와 전남 고흥,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한간호협회를 중심으로 서울 대한간호협회 회관과 고흥 ‘마리안느와 마가렛 나눔연수원’에 분향소를 마련하기로 는 등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록도의 마가렛이 오스트리아 시간 9월 29일 오후 3시 15분경 급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알려드립니다.”

추석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새벽 0시 59분에 제 휴대전화에 이런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제 휴대폰에 저장된 발신인 이름은 ‘소록도 김연준 신부’였습니다. 김 신부는 2016년 당시 소록도성당 주임사제로 두 천사를 기념하는 일에 앞장서고 계셨지요. 2016년 마리안느와 마가레트 간호사는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만해대상(실천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저는 만해대상 실무를 담당하면서 김 신부님과 자주 소통했었지요. 그런 인연으로 마가레트 간호사의 선종 소식을 바로 알려주신 겁니다. 부음 기사를 쓴 후에도 가슴 한쪽이 묵직한 느낌입니다.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아낌없이 나눠주기만 하다가 나이가 들고 병이 찾아오자 “폐 끼치기 싫다”며 훌훌 떠나버린 분들. 혼탁한 세상에서 흉내 내기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삶입니다. 이미 알고 계신 내용도 있으시겠지만 마가레트 할머니의 선종을 계기로 두 천사의 이야기를 좀 더 정리해 보았습니다.

‘소록도 천사’들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두 분은 오랜 동안 ‘수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녀가 아니라 ‘자원 봉사 간호사’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두 분은 ‘한국의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1960년대 소록도를 찾아왔습니다. 이분들을 후원한 것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였습니다. 가톨릭이 후원하고 두 분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분을 수녀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수녀’면 어떻고 ‘간호사’면 어떻습니까. 그분들은 소록도의 한센인들에겐 ‘천사’ 그 자체였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봐 '소록도 천사'로 불린 마가레트(왼쪽)와 마리안느 간호사. /김연준 신부 제공

“줄 줄은 알았지만 가질 줄은 모르는 분들”

1960년대 소록도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환자는 4000~5000명에 의료진은 절대 부족했다고 합니다. 한센인들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세상의 선입견과 시선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지요. 그 시절 두 천사의 언행은 진정한 감동을 줬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 새벽 5시 숙소에서 1km 떨어진 병원으로 출근했답니다. ‘마리안느&마가레트’라는 푯말을 붙인 방에 도착하면 벌써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유를 데워 대접하고 밤 사이 있었던 일 이야기를 나누고 병실을 돌면서 환자들에게 우유를 나눴다지요. 따뜻한 우유는 밥알을 씹기 힘든 환자들을 위한 식사였답니다. 병실을 돌면서 자신들의 무릎에 환자의 발을 올려놓고 냄새를 맡은 뒤 상처를 치료했다지요. 오전에 찾아오는 환자를 보고 미사를 드린 후 오후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과 치료 도구를 들고 7개 마을을 돌면서 환자들을 찾아다녔답니다. 마스크와 장갑, 방호복도 없이 흰 가운만 걸치고 환자들의 들러붙은 손·발가락을 떼어내기도 했답니다. 그러다보면 피고름이 얼굴에 튈 때도 있었지만 천사들은 개의치 않았다지요.

주변에선 “줄 줄은 알았지만 가질 줄은 모르는 분들”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일제 때 지어진 숙소에는 사과 궤짝 같은 장롱 하나와 오래된 냉장고 등이 전부이고 침대 머리맡에 한자로 ‘下心(하심)’이라 쓴 글귀가 걸려 있었다지요.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보수는커녕 법으로 정해진 정부 지원금도 받지 않으려 했다지요. “이걸 안 받으면 자원봉사도 할 수 없다”고 하자 마지못해 수령해서는 또다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썼다는 것이 그들과 함께 일한 사람들의 전언입니다.

언론 취재는 질색...기자 온다면 꽁꽁 숨어

언론 취재는 질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선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두 천사와 관련한 기사를 찾으면 ‘인터뷰 실패기’(?)가 검색됩니다. 조선일보에서 맛깔스런 인터뷰 기사로 유명한 최보식 전 선임기자와 한현우 문화전문기자도 인터뷰에 실패했습니다.

1997년 마가레트(왼쪽)와 마리안느 간호사가 조선일보 취재진을 피하고 있다. 이들은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조선일보DB

1997년 한현우 기자가 소록도를 찾았을 때 병원에서 스쳐 만난 두 천사는 “여기서 죽으면 여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죽으면 그곳에 묻히는 거죠. 하느님이 부르시면 그저 죽은 자리, 그곳 풍습대로 묻히고 싶습니다”라는 한 마디만 했습니다. 그러나 취재진의 카메라를 보자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답니다.

최보식 전 선임기자는 2002년 이틀에 걸쳐 소록도에 들어갔습니다. 첫 날은 ‘기자가 온다’는 눈치를 챈 두 간호사가 꽁꽁 숨어버린 바람에 얼굴도 보지 못했다지요. 철수하는 것처럼 ‘위장’(?)해 안심시킨 후 이튿날 다시 소록도를 찾아가 겨우 얼굴을 보았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눈이 마주치자 “기자?”라고 묻더니 “방해하지 마세요. 한국말 몰라요?”라고 쏘아붙이곤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답니다. 결국 두 기자는 소록도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두 천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달변의 인터뷰보다 실패한 인터뷰가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두 천사의 경우도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나이 들고 병 걸리자 편지 한 장 남기고 ‘몰래 귀국’

그랬던 이들이 2005년 홀연 소록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귀국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는 당신에게 많은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저희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 혈육보다 더 정성스럽게 한센인들을 돌봐온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는 미안함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두 사람이 나이가 들고 특히 마리안느 할머니가 대장암에 걸리자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고국으로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갑자기 떠나자 한동안 소록도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 천사는 한국에서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소록도와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이 100주년을 맞아 마리안느 할머니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 사이 대장암 수술과 치료를 받은 마리안느 할매는 약 두 달간 한국에 머물렀지요. 극심한 언론 기피증을 보이던 분이 2016년엔 기자회견도 했습니다. 언론을 피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거 하지 않아서 알릴 필요 없었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일을 한 분들은 거의 대부분 “특별한 일 한 거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분은 수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귀국 후에도 수녀원이 아니라 가족들의 도움과 국가에서 지급하는 최소한의 지원으로 살아가면서도 한국에서 지원하겠다는 뜻은 극력 사양했습니다. 이때 마가레트 할매는 치매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어서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왼쪽)와 마가레트 간호사의 귀국 후 모습. /연합뉴스

2016년 소록도 방문 계기로 노벨평화상 추천 캠페인도

2016년 마리안느의 소록도 방문을 계기로 두 천사를 기념하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소록도성당 김연준 신부가 적극적으로 앞장섰지요.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설립을 주도하고 다큐 영화 제작도 지원하면서 노벨평화상 추천 캠페인도 벌였습니다.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추천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모인 것이지요. 이 단체는 이후로 다양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 이사진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것도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명절을 맞아 인사차 찾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랬다가 뜻밖의 비보를 접하게 된 것이라고 김연준 신부는 전했습니다.

마가레트 할머니는 가까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먼 과거 일은 기억하곤 했다지요. 그래서 이따금 자신이 소록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곤 했답니다. 아마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소록도는 행복한 풍경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가레트 할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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