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초가을, 고등학생 정진석은 학교에서 평행봉 운동을 하다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왼쪽 허벅지 대퇴부에 급성 관절염이 왔다. 의료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열여섯 살 한창 꿈 많을 나이에 정진석은 학업을 중단하고 앓아 누워야 했다. ‘이대로 스무 살도 못 사는 짧은 생을 마쳐야 한단 말인가?’ 뒤칠 수도 없는 몸으로 울며 고뇌하는 밤들이 계속됐다.
◇아버지가 깎아준 지팡이
40대 후반이던 그의 아버지는 병든 아들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울음을 삼켰다. 피골상접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초췌해진 아들은 요에서 등을 떼지 못해 와창(臥瘡)이 날 지경이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아들이었지만 병마와 싸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 과수원 울타리로 심었던 탱자나무에서 잘 뻗은 가지를 잘라 정성스레 깎아 다듬고 불에 구운 뒤 니스칠을 했다. “이걸 짚고 일어나거라, 벌떡!” 그 단단한 나무 지팡이를 짚고 아들은 조금씩 몸을 추슬렀다. 남들보다 3년이 늦었지만 가까스로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훨씬 좋은 지팡이를 여러 개 구할 수 있었지만, 정진석(84)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그 탱자나무 지팡이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칫 희망을 잃을 뻔했던 가난한 나라의 젊은이가 다시 일어서서 학문의 일가(一家)를 이루게 했던 마법의 나뭇가지였다. 그리고 평범한 나무토막이 한 사람의 재기를 도왔듯, 그는 예사로워 보였던 숱한 언론 자료들을 역사를 밝히는 사료(史料)로서 거듭나게 했다.
스승이 쓴 ‘한국신문사’ 초안
중앙대 영문과 대학생 정진석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던 문학청년이었다. 그가 쓴 동화는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佳作)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뒤 문공부 산하 방송조사연구실에서 일하며 원로 언론인을 인터뷰하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픽션보다 오히려 언론사(言論史)가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구나!”
기자협회 편집실장으로 일하며 우리 신문의 옛이야기인 ‘신문유사’를 썼고, 집필을 위해 지금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누렇게 변색된 방대한 옛 신문 더미는 그야말로 역사의 바다와도 같았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언론사학자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어렴풋이 알거나 통 모르는 역사의 정면과 이면(裏面)이 그 속에서 갓 건진 활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걸 정리하고 밝혀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原)자료와의 씨름’이라는 미답의 행보가 시작됐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1883년의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부터 대한제국 시기의 대한매일신보, 총독부 자료와 해방 공간의 신문까지 중요한 자료들이 그의 손에 의해 정리되고 영인본으로 나왔다.
이어 치밀한 고증과 통계를 통해 ‘일제하 한국언론 투쟁사’ ‘한국언론사연구’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 기사 모음’ 같은 연구서를 냈다.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서 깨알만 한 글자들을 파헤치다 보니 시력 2.0이 넘던 좋은 눈이 이젠 침침해져 책상과 화장실, 자동차에 각각 다른 안경을 비치해 둘 정도가 됐다. 그 많은 연구 중에서도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대한매일신보 경영인인 배설(어니스트 베델)의 공판 기록을 비롯한 자료를 찾아낸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를 이끌어 준 학계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언론사의 1세대인 최준(1913~1995)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였다. 그는 스승이 쓴 ‘한국신문사’의 목차 초안을 지금도 갖고 있다. 개항 이후 1910년까지의 언론 역사를 모두 6개의 장(章)으로 구분했고,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언론 활동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에게 언론사 연구의 큰 틀을 마련해 준 메모였던 셈이다.
‘홍박’의 스케치북
언론사를 연구하며 정진석 교수는 당대(當代)의 유명 언론인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일보 역대 주필과 각별한 관계였다. 최석채(1917~1997) 주필은 평소 정 교수를 매우 아꼈는데, 최 주필이 별세한 뒤 정 교수는 그의 비문을 쓰고 추모 문집의 편집을 맡았다. 대쪽 같은 기질의 최 주필이 그에게 써준 ‘지성감민(至誠感民·정성이 지극하면 국민이 감동한다)’이란 글씨 역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원고 청탁 때문에 찾아간 선우휘(1922~1986) 주필은 무척 소박하고 격의 없는 인물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는 소장품은 홍종인(1903~1998) 주필이 남긴 스케치북이다. 여기엔 1970년대에 홍 주필이 그렸던 펜화와 수채화가 가득 남아 있다. 충북 영동 영국사 같은 고찰과 산간 마을을 묘사한 붓자락에서 상당한 솜씨가 느껴진다. “어느 신문사든 홍 주필이 버버리코트를 입고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했었죠. 다른 신문사에 가서도 ‘기사를 그렇게 쓰면 되느냐’고 버럭 호통을 쳤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다방면에 박식해서 ‘홍박’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정 교수의 언론사 연구 속에서는 이렇듯 신문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
평생 모으고 발간한 숱한 자료들이 소장돼 있던 서울 서초구 반포동 정 교수의 연구실은 재개발 때문에 사라지게 됐고, 다행히 2020년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고 별관에 ‘정진석 언론사료실’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이곳에 9000여 권에 달하는 장서와 자료들이 있다. 그는 “이 방 자체가 하나의 큰 보물인 셈”이라며 웃었다.
“자료 하나 보지 않고 근현대사에 대해 말로만 떠드는 사람을 보면 속으로 웃고 만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전체 흐름을 알지 못한 채 한두 건 기사만 보고 역사를 논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스마트폰 시대라고 해도 종이 신문을 제대로 봐야만 해요. 그래야 뉴스의 가치와 흐름,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