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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오키 섬을 취재하러 출장갔을 때, 내린 공항은 요나고(米子) 공항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항 이름이 희한했습니다. ‘요나고 기타로 공항’. 기타로? 아, 그것은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1922~2015)의 요괴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에 나오는 주인공이었습니다. 만화 주인공이 공항 이름이 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요나고 시내 곳곳에는 이 만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괴들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고, 요괴 모양의 과자를 파는 상점들도 있었습니다.
‘기타로’나 ‘포켓몬스터’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 참으로 일본은 요괴 문화를 통해 방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일본에 한정되는 일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조선일보 BOOKS 지면에서 ‘올해의 필자’로 선정된 젊은 학자가 있습니다. 보아·송가인과 동갑인 한국고전소설 연구자 이후남 한국연구재단 학술교수입니다. 그는 ‘K콘텐츠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방대한 분량의 한국 고전소설을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77편의 작품에서 모두 158종의 요괴를 찾아냈습니다.
‘전우치전’처럼 일반에 친숙한 책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옥란기연’ ‘삼강명행록’ ‘윤하정삼문취록’처럼 생소한 소설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했다뿐이지 우리 고전소설이 맞습니다
아,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척하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문학 작품에서도 요괴가 존재했구나.
그는 단행본 ‘요망하고 고얀 것들’(눌와)에서 이들 중 20여 종을 소개했고,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연구서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도 냈습니다.
어떤 요괴들이 그 속에 등장했던 것일까요? 사람을 속이며 변신하는 여우, 원숭이, 호랑이 요괴 정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며 미인을 납치하는 ‘금돼지 요괴’, 여섯 팔로 창칼을 휘젓는 키 15m의 ‘은행나무 요괴’, 물속에서 독을 내뿜는 집채만한 ‘털뭉치 요괴’에 이르면 “우리나라 옛날 얘기에 그런 게 다 있었어?”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일본 요괴가 선악 개념이 없는 존재인데 비해 ‘K요괴’는 선악 개념에서 명백한 악(惡)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 뭔 소리야, 그거 다 말짱 허황된 얘기 아냐?”
……결코, 그저 이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요괴를 그냥 못되고 허무맹랑한 존재라고만 여길 수는 없단 얘깁니다. 이후남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대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이 표현된 대상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현실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가 바로 요괴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담긴 허황돼 보이는 얘기가 고대인의 사고와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유교 이념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던 현실의 사람들이라면 감히 꿈꾸지도 못했을 행동을, 소설 속 요괴와 요괴가 쓰는 약물을 통해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1)구미호: 사대부 여인으로 둔갑해 미운 본처를 제거하고 온갖 남자들을 유혹함.
(2)올출비채: 인육으로 음식을 만드는 여장부. 화가 나면 남편과 시동생을 마구 구타함.
(3)개용단(改容丹): 성형의 꿈을 이뤄주는 약. 요괴가 먹으면 외모가 바뀜.
여기서 욕망의 단계가 더 높아지면 ‘금전’ ‘권력’ ‘인정 욕구’로 올라가게 됩니다. 여우 도사 ‘신묘랑’은 흥신소를 차려 재물을 모읍니다. 월나라 세 요괴는 국정에 참여해 요직을 맡고, ‘적룡’이라는 요괴는 사람들에게 제사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한국 요괴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다시 이후남 박사의 말을 들어보죠.
“인간과 거리 두기를 하며 소굴에 은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떨어진 사회성’과 ‘공감 능력 부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때론 가부장제에 반발하고 질투심을 숨기지 않는 등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수시로 ‘히어로보다 매력적인 빌런’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작 주인공은 사회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생이’인 경우가 많아 재미없다는 것이죠. ‘수호전’에서 노지심이나 이규는 무척 기억에 남지만 송강 좋다는 사람 못 봤고, DC 히어로물에선 보통 배트맨보다 조커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지 않나요? 물론 ‘포청천’처럼 공명정대한 주인공이 엄청난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없진 않습니다만.
이후남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8년 박사 논문 ‘고전소설의 요괴 서사 연구’를 썼습니다. 기존 연구가 거의 없어 애를 먹었고 주변에서도 처음엔 ‘왜 그런 주제를 잡았느냐’고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요괴가 ‘콘텐츠 트렌드’로 자리잡은 뒤엔 다들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했습니다. 인터뷰 중 인상깊었던 말은 “(정)교수가 되는 것엔 큰 관심이 없다. 오직 내가 하고 있는 연구를 하는 게 재미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희 세대로선 상상이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판타지가 글쓰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선조들이 재미있게 여긴 판타지를 생각만 해도 신이 나요. 현대인과 소통하며 새로운 콘텐츠로 되살아날 수 있는, 살아있는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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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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