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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코너에서 동양고전을 인용한 글을 쓰면 ‘무슨 케케묵은 공자 따위를 언급하느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러게 말입니다요. 공자님 말씀이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공자님 말씀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데 이르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귀동냥으로나마 들어본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공맹(孔孟)의 말씀은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허언(虛言)도 공언(空言)도 아닙니다. 시대상황과 유리된 유한계급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그 시대의 도저한 모순을 직시하고 한탄하고 참여하려 했던 실천적 철학자가 뼈를 깎는 고통스런 체험과 사유를 거쳐 내놓은 처절한 아포리즘이지요.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좌전(左傳)’과 ‘사기(史記)’를 위시한 그 대하(大河) 장강(長江)같은 역사기록들… 정녕 그게 단순한 옛날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나요? 2000년 전 사람들이 살아가던 그 천태만상의 모습들이 과연 그 잘난 합리적인 현대인들과 얼마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건 몰라도 ‘사기’의 열전(列傳) 하나만이라도 좋은 번역본을 골라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인간군상의 행동들이 늘 똑같이 되풀이되는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식자(識者)란 사람들이 이 책 하나만 제대로 읽어봤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영위하는 정경사문(政經社文)의 꼴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참고로 사기열전은 요즘 무척 좋은 주석본이 나왔습니다. 제가 최근에 쓴 다음 기사 참조 바랍니다.)
[남북조부터 현대까지 주석 비교, 사기열전 낸 50대 직장인]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간혹 “이건 도저히 요즘 시대와는 들어맞지 않는 옛날 얘기다”라고 느끼는 고전의 몇몇 부분들이 있습니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의 열다섯번째 글은 그런 부분들 중 하나입니다. 한번 보시죠.
孟子曰: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맹자왈: 인지소불학이능자, 기양능야; 소불려이지자, 기양지야.)
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배우지도 않고도 능한 것을 ‘양능(良能)’이라 하고,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있는 것을 ‘양지(良知)’라 한다.
* 주주(朱註)에선 ‘양(良)’을 ‘본연의 선(善)’이라고 했습니다. 정자(程子·송대의 유학자 명도 정호와 이천 정이 형제를 한번에 칭하는 말로 ‘코엔’ ‘티비아니’ 등의 말과 유사한 용법입니다)는 “양지와 양능이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천연(天然)에서 나온 것이지 인위(人爲)에 배어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也;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해제지동, 무불지애기친야; 급기장야, 무불지경기형야.)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장성해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親親, 仁也; 敬長, 義也. 無也, 達之天下也.
(친친, 인야; 경장, 의야. 무야, 달지천하야.)
부모를 친애함은 인(仁)이고 연장자를 공경함은 의(義)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온 천하에 공통된 것이다.
* 주자는 말합니다. “친친(親親)과 경장(敬長)은 비록 한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지만, 이것이 온 천하에 공통돼 같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인의(仁義)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맹자는 이 ‘양능’과 ‘양지’가 최고의 능력과 지식이라고 봄으로써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도덕성에 성실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양지와 양능은 후에 양명학파(陽明學派)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문용어로 등장하는데, ‘맹자’에서는 이곳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맹자 만년의 사상이거나 그 제자들이 발전시킨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김승혜 ‘원시유가’)
이제 펼쳐질 다음 장면들은 벌써 십수년 전의 일이지만, 그 이후로 지하철만 타면 비슷한 변주곡들이 계속 눈에 띄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 장면 1: 2호선 전동차 안 한 구석
나이 지긋하신 부부가 열차에서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복잡한 지하철 안, 열 정거장쯤 내내 서 있던 저의 뇌리에는 ‘앉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유혹이 막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좌석 위에 붙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약자·장애인을 위해 좌석을 비워둡시다.”
아아… 이건 일종의 기만이야. 도대체 누가 지하철공사나 도시철도공사에 ‘경로석’을 지정할 권한을 부여했단 말이던가. 그것도 하필 맨 구석자리 세 명이 간신히 끼여 앉는 자리에… 어르신이 이리로 오신다면 그때 비워 드리면 그만이 아닌가. 그럼 경로석 아닌 자리에선 양보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이런 못된 생각이 제 마음 한 구석에서 막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할 수 없는 것을 불인(不忍)이라 했던가요. 곧 자리가 빈 것을 본 어르신이 어느 쪽에서든 오시겠지. 저는 그냥 서 있기로 했습니다. 아, 5m쯤 떨어진 곳에 서 계신 한 할머니께서 마침 이쪽을 보셨습니다.
그때였습니다. 20대 초반의 아주 어리고 발랄하고 스피디한 남녀 커플이 15m가량 떨어진 곳에서 괴성을 질렀습니다. “야! 자리 났다∼” 그들은 고뇌의 순간을 단 몇 초도 겪지 않은 채 무섭게 돌진하더니, 저를 밀치고 그 자리에 잽싸게 주저앉았습니다. 그들은 장애인이라기엔 너무나 멀쩡해 보였습니다.
.....양능(良能)?
# 장면 2: 같은 곳, 다른 날
퇴근길이었습니다. 전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경로석은 아니었습니다. 지하철 좌석의 최고 명당이라는 긴 의자 맨 끝자리였습니다. 머리를 벽에 기댈 수도 있고 팔을 걸칠 수도 있죠. 제 옆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한양대역에서 지팡이를 짚으신 할아버지와 짐을 머리에 인 할머니께서 열차를 타셨습니다. 전 재빨리 일어났습니다.
“어르신, 여기 앉으시죠.” “아닐세 젊은이. 우린 선릉역까지밖에 안 가…” “아유, 전 성내역까지 가는데요. 선릉역이라면 아직도 열 한 정거장을 가야 합니다. 앉으십시오.”
그때였습니다. 5~6세쯤 돼 보이는 ‘해제지동(孩提之童)’이 총알같은 속도로 뛰어와 제가 일어난 빈 자리에 올라앉은 것은. 하도 순식간의 일이라 저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당황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 나 앉았다~.” 그러자 그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30대 여성이 데시벨 높은 목소리로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얘…!!”
아아 그렇지! 부모라면 저런 버릇없는 아이를 당연히 꾸짖어야지. 아직 세상에 의로운 부모가 이렇게 남아있구나.
그런데 그 엄마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얘! 구석으로 들어가 앉아! 엄마도 앉아야지 너만 앉니?” 잠시 후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성수역에서 내린다.”
.....양지(良知)?
# 장면 3: 이번에도 2호선(2호선만 그럴까?)
출근길에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앉아있던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뭔가가 제 옆구리를 불시에 가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간 전 “악!”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옆을 돌아보니 운동화를 신고 좌석 위에 올라선 한 어린애가 역시 운동화 발로 저를 걷어찼던 것이었습니다. 전 그 애와 그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을 황당한 표정으로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죠.
그때 그 ‘엄마’가 저에게 이렇게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지 그정도 받아줄 여유도 없어욧!”
도저히 그 자리에 계속 앉아 갈 자신이 없어, 일어나 옆 칸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능(良能)? 양지(良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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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난신적자 하극상의 암흑천지 난세(亂世)였다고 해도, 맹자가 살았던 그 시대에는, 분명 어린 사람들이라 해도 웃어른을 공경하고 예우하는 최소한의 ‘기본’은 갖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가르쳐 줘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고 행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오늘날의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 속에는 맹자가 간과한 부분이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질병이 상호간에 전염되는 것처럼, 예의도 사람들이 이를 보고 서로 따라 배운다.” 윗 글의 장면 2와 3에선 버릇없는 아이들이 과연 누구를 보고 배우는 것인지 그 실마리가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젊은 학생들은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 통화를 할 때면 셋 중 둘 정도는 입을 가리고 합니다(가끔은 귀를 막고 통화하는 못돼먹은 학생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마치 휴대폰이 아직도 부(富)와 명예의 상징이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기를 높이 들고(이런 분들일수록 지갑형 휴대폰 케이스를 사용해 얼굴 옆으로 명함과 메모지가 바람결에 휘날릴 때가 많습니다) “아 김사장? 나야 나, 지금 어디라고? 어---디???” 하고 고래고래 외치시는 분들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그다지 젊은 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젠가 한국어의 존비어를 없애고 모두 경칭을 써야 사회가 평등해진다는 학자의 의견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禮)를 확대하자는 것이지 그것을 무시하고 서로 욕설을 퍼붓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도한 사람들이 연세 지긋한 공인에게 친한 친구에게도 함부로 하지 못할 인신공격성 욕설을 퍼붓는 건 21세기의 안타까운 세태라고 여기고 억지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소위 ‘공인’이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허명을 걸친 사람들이 큰형이나 숙부이거나 부모뻘 되는 분들에게 차마 듣기 민망한 솔구이발(率口而發)을 자행하는 참으로 가당찮은 모습에까지 이르면,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맹자나 왕양명이 살아서 이 광경을 봤더라면 자신의 학설을 조금 수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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