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 묘관음사 대웅전 앞에는 종려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이국적 풍경을 보여준다. /김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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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마당에 야자수(종려나무)가 있는 풍경이 이채로웠습니다. 어느 먼 남쪽 나라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주 찾은 부산 기장 묘관음사(妙觀音寺)입니다. 묘관음사는 오래 전부터 방문해보고 싶었던 사찰입니다. 계기는 2016년 ‘불교신문’에 법념 스님이 연재한 ‘향곡 큰스님 일화’라는 글이었습니다. 법념 스님은 1972년 출가 직후부터 3년간 묘관음사에서 향곡(1912~1978) 스님을 시봉했는데, 당시 일화를 맛깔스런 글솜씨로 전했습니다. 그 무대를 한번 꼭 보고 싶었습니다.

향곡 스님은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과 함께 1940년대 후반 봉암사 결사를 함께하며 한국 현대불교를 이끈 분입니다. 성철 스님의 둘도 없는 도반(道伴)으로 알려졌지요. 묘관음사는 향곡 스님의 은사인 운봉 스님이 1941년에 창건한 사찰입니다. 1946년 운봉 스님 입적 후엔 향곡 스님이 중창했고 1960~70년대 이곳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했지요. 성철 청담 서옹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묘관음사를 찾아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향곡 스님이 계셨기에 당대의 거인들이 찾아왔겠지요. 조계종 종정을 지낸 진제 스님이 향곡 스님의 제자입니다.

묘관음사 경내의 '탁마정'.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이 서로의 공부를 독려하며 우물에 처박으려고 했다는 전설이 서린 현장이다. /김한수 기자

비교적 역사가 짧은 묘관음사에는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향곡·성철 스님의 전설적인 스토리가 배어있습니다. 두 분은 평소에도 서로 “밥값 내놔라”면서 법거량을 했다고 하지요. 도반(道伴)으로서 서로의 공부를 격하게(?) 격려한 것이지요. 두 분은 묘관음사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깨달은 바를)일러보라”며 경내의 우물에 메다꽂을 것처럼 했다지요. 인근 임랑해수욕장 바닷물 속에 서로 집어넣을 것처럼 몸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로의 공부를 탁마한 현장으로 훗날 ‘탁마정(琢磨井)’이란 이름이 붙은 우물이 대웅전 바로 왼편에 있습니다. 한국 현대불교의 거인들이 벌인 전설의 무대인 셈이지요.

그 현장이 궁금했지만 그동안엔 인연이 잘 닿지 않았는데, 마침 지난주에 시간이 나서 묘관음사를 찾게 됐습니다. 묘관음사는 입구부터 일반 사찰하고는 달랐습니다. ‘일주문’에 해당하는 출입구가 ‘지하차도’였습니다. 일주문 위로는 부산과 울산을 잇는 동해선 철도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지하도 위에는 ‘임제종찰 법림산 묘관음사’라는 글씨가 돌에 새겨있었습니다. 과거엔 평지에 철도 건널목이 있었다고 하는데 철도 노선이 사찰쪽으로 가까이 옮겨지면서 지하도를 내고 일주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절묘한 절충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묘관음사 일주문. 동해선 철도 아래 지하도를 일주문으로 삼았다. /김한수 기자

입구에서부터 남다른 느낌을 준 묘관음사는 작지만 아름다운 절이었습니다. 1000년 고찰(古刹)이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80년 역사의 사찰은 ‘젊은 절’입니다. 그렇지만 묘관음사는 화려한 ‘새 것’ 냄새가 많이 나지 않으면서 아늑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을 비롯해 경내 곳곳에 자리잡은 종려나무는 남국(南國)의 느낌을 풍겼습니다. 아담한 크기의 대웅전은 꽃살문이 아름다웠습니다. 대웅전 오른편 축대 위에 자리한 조사전엔 마조, 남전, 백장 스님 등 중국 선사(禪師)들의 진영(초상)이 가운데에 있고 오른쪽으로는 경허, 운봉 스님, 왼쪽으로는 혜월, 향곡 스님의 초상이 배치돼 묘관음사로 이어진 법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각 전각들을 이어주는 계단과 길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동백은 꽃망울이 맺힌 상태였습니다. 인터넷 블로그를 보니 가을에는 꽃무릇이 유명하다고 하네요. 관음전 앞에 서니 눈앞에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묘관음사 풍경. /김한수 기자

묘관음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0년전 주지로 부임한 서강 스님이 공이 컸습니다. 서강 스님은 향곡 스님의 손상좌입니다. 선방(禪房)을 다니다 10년 전쯤 주지를 맡은 후 전각 다섯 채를 새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 사찰의 규모도 작고 초라했다고 합니다.

‘탁마정’도 서강 스님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답니다. 우물은 깊이가 6m 정도로 깊은데다 비가 오면 물이 넘칠 정도여서 위험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서강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기 전에는 시멘트로 덮고 막아버린 상태였답니다. 그런데 묘관음사를 찾는 방문객들이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이 몸싸움 벌인 우물은 어디있느냐’고 자꾸 물었다네요. ‘전설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서강 스님은 화강암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 탁마정을 복원했답니다. 물론 식수로 쓰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기념물인 셈입니다.

탁마정 옆에는 이런 안내문이 있습니다.

‘탁마라 함은 옥 따위를 갈고 닦는 일 또는 수행하며 학문, 기예, 정신 따위를 향상시키는 행위나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향곡, 성철 두 분 스님께서 젊은날 이곳에서 수행하실 때 더욱 더 깊고 세밀한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코자 한 스님께서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물 속으로 머리를 처넣고 올려 주지 않아 생명이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여 한마디 이르도록 하여 공부를 지어나가셨는데, 뒷날 두 분 스님은 차별삼매를 낱낱이 점검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사의 반열에 오르셨다. 복원은 수행에 뜻을 둔 후학이라면 능히 탁마정을 봄으로 회심하여 자기자신의 수행 정도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삼락 이근창 거사의 발원과 혜경 이병교 거사의 감리가 큰 힘이 되어 이루어졌다. 이 글을 읽는 이여! 마땅히 두 분 스님의 처절했던 그 때의 심경을 한번쯤 헤아려 봄이 어떠할는지!’

묘관음사 부도전 앞 바닥에는 화엄사상을 도형으로 보여주는 법계도가 깔려 있다. /김한수 기자

대선사(大禪師)가 머물렀던 사찰에 선원이 빠질 수 없습니다. 경내 왼쪽 언덕에는 길상선원이 있습니다. 서강 스님은 “향곡 스님 당시에는 대웅전 옆 건물을 선원으로 사용했다는데 규모가 작았음에도 동안거·하안거 때면 비구·비구니 40여명이 모여 참선수행에 매진했다고 한다”며 “현대식 건물로 선원을 새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동안거(음력 10월 보름~정월 대보름) 중인데 주지 서강 스님을 비롯한 9명의 선승들이 정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강 스님은 점심 공양 시간에만 잠깐 선원에서 나와 주지 소임을 보고 있고요. 서강 스님은 “머리 깎은 중이라면 공부(수행)를 해야지요”라고 했습니다.

묘관음사는 철도로도 갈 수 있습니다. 절 앞을 지나는 동해선 월내역에서 1.4㎞ 정도 거리여서 해변을 따라 도보로도 30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또 근처엔 박태준기념관과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밭에서’라는 카페 그리고 임랑해수욕장도 있습니다. 부산 기장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아름다운 묘관음사를 방문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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