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영화 ‘건국전쟁’은 전문가 인터뷰와 사료 분석을 통해 그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오해를 걷어내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다큐가 밝히는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짚어 본다.
①분단의 책임자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5년 8~9월 38선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했다.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슈킨에게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정권을 수립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아직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서 토지 국유화를 추진했다. 분단의 원인은 이승만이 아니라 소련과 북한이었다.
②친일파를 등용했다?: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 법무부 장관 이인, 문교부 장관 안호상, 농림부 장관 조봉암 등 대한민국 초대 내각 각료 대부분이 항일·독립운동가였다.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에 협조한 인물에게 과거를 묻지 않은 결과 내각에 강양욱·이승엽·정국은 등 과거 친일 경력이 있던 인물이 상당수 들어갔다.
③6·25 때 도망간 ‘런승만’이었다?: 미국 CIA 감청 부서에서 기록한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라디오 연설 원본을 분석한 결과, 연설 어디에도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 달라’는 내용은 없었다.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한반도를 떠나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인민군이 들어오면 이 총으로 그들을 쏘고, 마지막 한 발은 내게 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에 나오는 증언이다. 이승만은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를 떠나지 않고 국토를 사수했다. 전쟁을 일으켜 놓고 불리해지자 가족을 만주로 피신시킨 인물은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④미제의 앞잡이였다?: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런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주한미군 주둔, 한국군 증강, 8억 달러 경제원조 등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얻어냈다. 그 결과 70년 이상 100명 이상이 죽는 전투가 한반도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역사상 유례 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
⑤독재자였다?: 만약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엎는 독재 체제였다면 의회와 언론의 역할이 봉쇄돼야 했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것은 당시 야당의 정치적 구호 속에서 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평화선과 독도 수호, 전체 예산의 20%를 배정했던 교육 정책, 원자력 산업의 초석 등 1950년대에 숱한 업적을 이뤘다.
⑥부정선거 원흉이었다?: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 조병옥의 서거로 인해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공작으로, 이승만과는 무관했다. 이승만은 4·19가 일어난 뒤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고 “내가 맞아야 할 총을 우리 귀한 아이들이 맞았다”며 울었고, 스스로 하야하는 용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