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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에서 사람들이 무척 의아해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6·25 전쟁 초기에 망명 정부를 세울 것을 권유하는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총을 빼들었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이 일화를 처음 접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길까요. 그리고 어느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1900~1992) 여사가 쓴 영문 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 이후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해 재반격을 시작하는 1951년 2월 15일까지의 상황을 다룬 비망록입니다. 1983년 뒤늦게 공개됐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별세하고 18년이 지난 2010년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란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일기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가장 어렵고(서울철수·낙동강방어), 가장 혼란한 시기(부산 피란과 1·4 후퇴)에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관계, 한미관계, 군사문제, 전선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그 장면은 1950년 8월 14일의 일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북한군의 침공으로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렸고, 적군이 포항 일부까지 진격한 백척간두의 상황이었습니다. 프란체스카는 부산으로 후퇴한 대통령 옆에서 그가 미국 대사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진 것은 하루 전인 8월 13일의 일입니다. 무초 대사는 존 콜터 장군, 드림라이트 1등 서기관과 함께 이승만을 찾아옵니다. 콜터는 ‘사흘 이내에 3000명의 한국군 병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무초가 이승만에게 ‘본론’을 꺼냅니다. 프란체스카 일기는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 전체가 공산군에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승만에게 “더 이상 여기 있다가는 위험하니 한반도를 떠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사의 독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미 정부의 의향이 들어 있는 건의가 분명합니다. 실제로 중공군 개입 이후인 1951년 1월 11일 미국 정부가 세운 철수 계획 NSC100은 ‘제6방어선(낙동강 방어선)까지 무너질 경우 유엔군은 일본으로, 한국군은 연안 도서로 철수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서 연안 도서라는 것은 제주도나 오키나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본토를 내주고 제주도로 옮긴다? 대만으로 철수했던 장제스 정부의 운명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었죠.
훨씬 더 비극적인 시나리오도 있었습니다. 1951년 4월 3일 미 극동군사령부는 비밀 작전계획 CINCFE4-51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선별된 포로를 사이판과 티니언 섬에 이송한다.” 팔라우와 괌, 파푸아뉴기니, 서사모아 같은 다른 후보지를 고려한 끝에 압축된 두 지역이었습니다. 사이판(115㎢)과 티니언(101㎢)의 면적은 각각 현재 대한민국 면적(10만401㎢)의 0.1% 수준입니다.([유석재의 돌발史전] 1951년, 대한민국은 사이판으로 ‘이전’할 뻔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relion-academia/2022/06/03/UIYEVW4YLZAR7DXZNCRHEMF3YM/)
다시 말해 무초의 건의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이승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프란체스카의 일기를 다시 들여다보겠습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져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 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아내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발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히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을 못하고 혼비백산해 돌아갔다.>
이것은 이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프란체스카가 대단히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한 다음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큽니다. 그 다음 대목을 보면 이날 얻은 프란체스카의 충격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밤 나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악몽과 환상에 시달렸다. 바로 눈앞에 공산당이 나타나 대통령이 나를 쐈는데 불발이 돼 우리가 붙잡히거나, 치명상을 입지 않아 목숨이 붙어있는 바람에 그들에게 곤욕을 치르는 환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대통령이 나를 쐈다. 그런데도 죽지는 않고 피만 흘렸다. 나는 피를 흘리며 공산당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소스라쳐 눈을 뜨면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프란체스카는 7월 21일의 일기에선 이승만의 이런 말도 기록했습니다.
“일본 자위대가 재무장하고 우리를 도우러 현해탄을 건넌다면 총부리를 그쪽으로 먼저 돌리겠다.”
만약 그때 이승만이 한반도를 버리고 제주도로 가라는 무초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과연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할 수 있었을까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15일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때 이승만이 미 대사 앞에서 모젤 권총을 빼 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태어나 자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도 멀쩡히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그를 ‘런승만’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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