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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정읍선언’을 검색하면 이런 글이 가장 먼저 뜹니다.
<정읍선언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6년 6월 3일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이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에 호소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던 선언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썼나 궁금해서 봤더니 제 기사더군요.
돌이켜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 역시 당시에는 ‘한반도 분단의 최고 책임자는 이승만’이라는 생각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 생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정읍발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선언’이 아니라 ‘발언’으로 격을 낮춰 불렀습니다. 1946년 6월에 남한만의 정부를 조직하자고 했다고? 얼마나 권력욕이 심했으면 나라를 반쪽 내서라도 가지겠다는 것이었다는 말인가!’
그보다 4개월 전에 38선 이북에 수립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군대를 조직하고 화폐를 발행하고 농지개혁을 주도한 사실상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당시에 주변에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946년 2월에 이미 북한에 정부가 들어선 것이었는데 말이죠.
이게 뭔가. 그렇다면 1946년 2월 이후에 북한에서 주장한 소위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성립한 북한 정권을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남한 지도자 몇 명을 들러리로 세운 채 수립하는 통일 인민공화국! 지금이니까 이것이 섬뜩하게 들릴 뿐, 1946년의 국민들은 별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공산주의는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던, 자본가도 아니고 지주도 아니며 가진 것 하나 없는 빈털터리 정객,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중도파에 비해 미 군정의 지지도 받지 못하던, 마치 독불장군처럼 보이던 단 한 인물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 사람은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이토록 흥행할 줄은, 일간지에서 처음으로 그 영화에 대한 기사를 썼던 저 역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영화적 기법도 눈에 띄지 않는 그 영화가 성공한 것은 오직 ‘우직한 팩트의 힘’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이승만이 건국을 위해 과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새삼 떠오르는 옛 인터뷰가 있습니다. 2017년 8월 9일자 조선일보에서 저는 이정식(1931~2021)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이정식’ 하면 ‘스칼라피노’, ‘스칼라피노’ 하면 ‘이정식’이 생각날 정도로, 이정식 교수와 로버트 스칼라피노(1911~2011)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가 함께 쓴 1972년의 고전적 명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Communism in Korea)’ 때문입니다. 미국 정치학회 최우수 저작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禁書) 취급을 받았던 책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대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혔습니다. 좌파 독립운동사와 북한에 대한 객관적·체계적 정보에 목말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60여 년 동안 북한 문제를 연구해 온 한국 현대 정치사 연구의 권위자이던 이정식 교수는 미국에서 새 저서 ‘북한: 획일적 국가 수립(North Korea: Building of the Monolithic State)’을 출간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사실 예전에는 자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추측해야 했던 부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옛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많은 문서에 힙입어 더욱 자신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 정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됐는가요?
“그 동안 한국 학자들은 1945년 9월의 ‘런던 회의’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문제와 별 상관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그건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 외무장관들이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회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죠.”
-어떻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까?
“소련의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 전후 일본 통치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북아프리카 트리폴리타니아 할양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미국과 영국이 일축해 버렸습니다. 런던 회의는 9월 15일쯤 결렬됐고, 이로써 약간 온기가 남아 있던 미·소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어요.”
-스탈린이 어떻게 나왔을지 걱정됩니다.
“네. 닷새 뒤인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 중요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북조선의 광범위한 반일(反日) 민주주의 정당 연합을 토대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설립하라’는 것이었어요. 이 지령에는 미군과 교섭하거나 협조하라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소련 점령 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지시였던 것이죠.”
(얼핏 공산주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것은 사실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 정권 수립의 전단계 역할을 한 정부였습니다.)
-그렇다면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1945년 9월 ‘북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소련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1948년 북한 정권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죠.”
(기자는 궁금한 점이 생기면 즉시 질문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이라도 말이죠.)
-아니 그럼 선생님, 1946년 6월의 이승만 ‘정읍발언’은….
“아이고, 아직도 그 얘기 하고 있어요? 스탈린이 이미 1945년 9월에 지령을 내렸다니까. 이승만이 귀국한 건 1945년 10월이었어요. 이승만이 아직도 미국에 있을 때 스탈린이 단독 정부 지령을 내린 거예요.”
그렇다면 ‘정읍발언’, 아니 ‘정읍선언’의 의미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요. 1946년 6월 3일 지방 순회 중 전북 정읍을 방문한 이승만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해 6월 정읍선언 77주년을 기념해 우남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선 이런 분석이 나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직후부터 이승만은 한반도에 하나의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미·소·영·중 정상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10월 16일 귀국 후 38선 철폐 운동을 벌이는 한편 자신과 김구·조만식·김일성으로 구성된 남북 지도자 모임을 열어 12월까지 중앙정부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은 인구 비례로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이미 북한에 인민 정부를 세운 소련은 남한까지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미 실패했다고 판단했죠. 소련은 친소(親蘇) 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은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남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은 뒤 소련을 압박해 통일 정부를 세우는 방안이었습니다. 결국 정읍 선언은 단독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통일 정부가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읍 선언을 한반도 분열의 출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새로운 통일 선언’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죠.
결국 정읍선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기 위해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민족 통일 달성’이라는 단계적인 통일 정부 수립론을 공표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6월 3일 ‘정읍선언’의 현장인 정읍동초등학교 현장에선 77년 만에 처음으로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읍선언 기념사업회 측이 정읍동초등학교에 정읍선언 기념패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의하자 정읍동초 측이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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