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법정 스님이 길상사 법회에서 신자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 /조선일보DB

지난 6일은 법정 스님의 입적(入寂) 14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법정 스님 생각이 납니다. 특히 매년 봄·가을 길상사 정기 법문이 떠오릅니다.

법정 스님은 알려진 대로 깔끔한 분이었습니다. 김영한 보살로부터 시주받아 문을 연 길상사에서는 생전에 하루도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지요. 법문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일 아침에 길상사에 도착해 행지실(行持室)에서 지인들과 차를 마신 후 바로 극락전에서 법문을 했지요. 행지실은 사실상 주지실(住持室)인데요, 굳이 ‘머물 주(住)’가 아닌 ‘갈 행(行)’자를 써서 행지실이라 이름 붙인 것에서도 법정 스님 특유의 깔끔함을 느낄 수 있었지요. 법문 후에는 점심 공양(식사)을 한 후 또 훌쩍 떠나곤 했습니다.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서 은거한 법정 스님은 서울 나들이 횟수를 점차 줄이다가 2004년부터는 봄·가을 두 차례 대중 법문을 했습니다. 물론 매년 길상사 신자들의 하안거·동안거 시작과 끝 법회 때 법문도 있었지만 이때는 주로 불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죠. 이에 비해 봄·가을 법문 때에는 불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많이 들으러 왔지요. 이때는 스님도 일반인들이 들어도 도움이 될 법문 주제를 고르곤 했지요.

법정 스님 생전에 저도 봄·가을 법문 때엔 길상사로 ‘출근’했습니다. 법문을 정리해 다음날 신문에 소개하기 위해서였지요. 독자들도 ‘스님이 이번에 무슨 말씀을 하셨나’ 관심이 많았고요.

스님의 법문이 있는 날이면 성북동 일대는 인파가 붐볐습니다. 스님이 법문 하는 극락전엔 일찍부터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찼고, 마당까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경내 여기저기에 스피커가 설치돼 마당에서도 스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가는 사람들 소리 때문에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몇 군데를 돌다가 그 중 소리가 잘 들리는 스피커를 찾았습니다. 극락전에서 행지실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스피커였습니다. 그 스피커 아래엔 마침 넓적한 바위가 있어 걸터앉아서 메모를 할 수 있어 좋았지요. 요즘처럼 음성을 문자 텍스트로 바꿔주는 기계도 없던 시절, 쫑긋 귀 기울이며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받아 썼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대개 40분 안팎이었습니다. 원고를 미리 준비해서 마이크 앞에 놓고 법문했지요. 그렇지만 내용을 다 숙지한 듯, 거의 원고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스님이 키워드만 메모해서 즉석 법문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꼈지요.

처음엔 생으로 받아쓰려니 팔이 저렸습니다. 그런데 법문을 몇번 듣다보니 저도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스님이 행지실에서 차를 마시고 법문을 위해 극락전으로 내려오는 길에 “오늘은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는지요”라고 여쭤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스님은 법문 주제에 대해 살짝 ‘힌트’를 주셨습니다. 미리 ‘예습’을 한 덕분에 법문을 들을 때에도 주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니 받아쓰기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받아쓰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바로 법정 스님의 ‘말솜씨’입니다. 법정 스님의 글솜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요. 그에 비해 스님의 ‘강연 솜씨’ ‘말솜씨’는 저평가됐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보통 글솜씨와 말솜씨는 함께 갖추기 어렵다고들 하지요. 말과 글의 재능은 따로 있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법정 스님은 글솜씨와 말솜씨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30~40분 동안 청중들은 스님의 법문에 몰입하곤 했습니다. 매번 다른 주제로 법문하지만 청중의 몰입도는 항상 대단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강약 조절’ ‘강조와 반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에서는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표현하는 스님이지만 법문이나 강연을 할 때에는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라고 말한 후에 다시 한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돼요”라고 반복합니다. 이어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으로 이어지지요. 청중들은 스님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들으면서 무엇을 강조하는지 알 수 있게 되지요. 때론 “명심하십시오”라고 구체적 사인을 준 후 2~3번 같은 문장을 반복합니다. 가령 스님이 자주 강조한 “횡재는 횡액을 부릅니다” 같은 문장도 글에서는 한 번만 써도 법문이나 강연에서는 2~3번 거듭 강조하지요. 듣는 입장에서는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저처럼 받아쓰는 입장에서는 “명심하십시오”라는 사인이 나오면 더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이런 법문 내용은 다시 책으로 정리돼 출간되곤 했습니다. 물론 책으로 나올 때에는 원래의 담백한 문장으로 정리된 상태였지요. 스님의 법문에 대해 생각하니 유언장이 생각납니다. 유언 내용 중에는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라는 부분이 있지요. 왜 스님이 ‘글빚’이 아니라 ‘말빚’으로 표현했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스님에겐 글과 말이 둘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글과 말의 차이 또한 정확하게 알고 가장 효과적으로 독자와 청중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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