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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인터뷰 당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촬영한 법정 스님의 모습. /이진한 기자

법정(法頂·1932~2010) 스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4년이 됐다고 합니다.

[[김한수의 오마이갓]글솜씨에 비해 저평가 된 법정 스님의 ‘말솜씨’]

돌이켜 보면 저는 기자 생활 중 단 한 번 그분을 만나뵌 적이 있었습니다. 2006년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주말에 감기몸살을 심하기 앓은데다 어쩌다 종교 담당도 아닌 저한테 떨어진 취재였기 때문에 당시엔 수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켜보면 대단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채 다 녹지 않았지만, 서울 성북동 길상사 대웅전 앞마당은 수백 명의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일요일인 2월 12일 오전, 참선 수행인 동안거(冬安居)를 끝낸 법정 스님이 이곳에서 대중들에게 법문을 전하게 되는 자리였습니다. 산 속에서 쓴 ‘무소유’ ‘산방한담’ ‘텅 빈 충만’과 같은 산문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색과 수도를 통한 인생의 참뜻을 전해 온 바로 그 인물이었습니다.

“오셨어요.” 사람들이 뜰에 놓인 의자 위에 앉고, 스님은 대웅전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교계에서 이렇게 많은 청중을 상대로 설법하는 스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새해 복 받은 업으로 날마다 복된 말을 맞으십시오.” 스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음성은 편안하면서도 강렬했습니다. “제가 겨울 동안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지요. 이번 겨울에 강원도에는 좀처럼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기우제가 아니라 ‘기설제’까지 지낼 정도였지요. 눈이 오지 않으면 스키장 영업도 안 되고, 여기에 봄 가뭄까지 겹치면 농사까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폭포가 얼었다고 합니다. 개울물이 바닥까지 꽁꽁 얼었다는 것입니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덮인 눈이 보호막 역할을 해 줘 개울 바닥에는 물이 흘렀겠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메말라가고,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이란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 쓰듯 한다’는 말은 얼마나 무엄한 표현인가요?”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드랍고 맑고 투명한 물도 한 번 얼어붙으니 도끼로도 잘 안 깨질 지경이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렇게 한 번 얼어붙게 되면, 모진 마음을 먹게 되면,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메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심여수(心如水), 마음이란 물과 같습니다. 물은 흘러야 하고, 흐르는 것이 물의 생태입니다. 흐름으로써 자연도 살고 만물도 살지요.” 흐르지 않는 물은 생명력으로부터 소외됩니다. 스님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갇혀 있으면, 흐르지 않고 얼어붙는다면, 온전한 마음이 아니라 병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표현은 관념적입니다. 마음이란 닦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용심(用心)이지요. 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꽃이 필 수도 있고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시돋힌 말을 친구에게 한다면, 그 말이 친구에게 닿기도 전에 내 자신이 괴롭게 됩니다. 온전한 마음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말하면, 그림자가 실체를 따르듯 즐거움이 그에 따르게 됩니다.”

가족이란 몇 세에 걸친 인연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가족으로 만난 것이라고 스님은 말했습니다. 배우자를 싫어하면 내 자신의 삶을 먹칠하는 것이란 얘기죠. “내 아내, 내 남편이 부처요 보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고 보살의 마음이 되며 업(業)이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을 남긴다면 이 다음 세상 또 어디선가 만나 지지고 볶게 됩니다.” 스님은 “오늘을 계기로 마음을 다 풀어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물처럼 너그럽고 따뜻하게 흘러야 인생에서 화창하고 향기로운 봄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문이 끝났습니다. 어느새 점심 때. 공양(절에서의 식사)을 하러 식당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님의 말은 낮은 일상으로 내려와 쉬운 비유로 깊은 진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해는 법정 스님이 출가 50주년을 맞는 해였습니다. 스님은 한 산방에서 기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지게 돼 있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앉아 있던 스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식사는 하셨소?”

이날 그와 처음 만난 저는 흠칫 놀랐습니다. 사실 상당히 무서운 눈빛이었습니다. 사람의 속마음까지 궤뚫어 볼 듯한 강렬하면서도 형형한 눈빛, 한편으로는 무척 부드럽고 예(禮)를 갖춘 몸가짐이었습니다. 차를 권하는 그에게 출가 50년을 맞는 감회를 물었습니다. 스님은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2006년 4월 길상사에서 ‘스스로 행복하라’를 주제로 법문하는 법정 스님.

“수행자에게는... 본래 세월이란 붙지 않는 것이지요. 섣달 그믐날만 되면 새해엔 내가 몇 살이지 하다가 ‘아이쿠 내가 벌써 이렇게 됐나, 나잇값은 하고 있나’는 물음이 가슴을 치곤 합니다. 헛 이름만 세상에 떨치고, 실속 없는 중 노릇만 하지 않았나 반성이 됩니다.”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했던 스물두 살 청년 법정은 홀연히 집을 나섰습니다. 전쟁의 포화를 겪은 뒤 그는 세속적인 욕망의 끈을 놓아버리려 했습니다. 그때가 1954년. 고통스러운 방랑의 길을 떠난 지 이윽고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그는 효봉(曉峰) 스님으로부터 예비승려가 되는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계를 받은 1956년 7월을 출가한 때로 꼽았습니다.

“잠깐 같은데 50년이 훌쩍 지났어요. 특히 출가 초기에 괴팍을 많이 떨었던 게 반성이 되는군요.”

젊은 법정은 혈기왕성한 승려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억새풀처럼, 늘 서슬 퍼런 기세였다고. 가까이 하면 베일 것 같다고. “풋중일 때는 아직 출가의 긴장감이 살아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한 사진기자는 그를 만나러 산으로 올라왔다가 눈빛이 너무 무섭다며 그냥 내려가기도 했다고 합다다. ‘설사 부처가 가는 길이라도 누가 한 번 간 길이라면 나는 그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선(禪)불교의 가르침이기도 했고, 법정 역시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학승(學僧)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과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여했고, 한글 대장경 번역 작업도 맡았습니다. 불교신문사 주필로 있던 1960년대, 신문에 ‘월남전 파병을 반대한다’는 글을 실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쓰던 ‘무운장구’라는 말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을 내놓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총무원장이 ‘승적을 박탈하겠다’며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제도권 불교와는 그만 인연을 끊은 셈이지요.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았어요. 더구나 이젠… 나서지 않을 겁니다. 후배들도 많고…”

그 후에도 시국을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고 있던 어느 날, 법정은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증오심이란, 독을 품은 것이지요. 내 수행이나 인간 형성에도 도움이 안 되겠다 판단했습니다.” 1975년 10월,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법정은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옮겼습니다.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서 밭을 매고 밥 지으며 17년을 살았습니다. 그의 주옥같은 산문집들이 이때부터 한 권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명예를 내버린 그가 되찾게 된 것은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이었습니다.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에 귀의하고 흙과 가까워야 합니다.”

‘더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나누어라’ ‘자주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하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그의 수행과 사색에서 나온 철학적 언어들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남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산 속 암자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예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1992년이었습니다.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을 찾아냈습니다. 이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도 아직 그의 거처를 모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자는 일과를 매일 지키는 그는 조반 전에 녹차를 마시며 참선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라고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야말로 가장 맑고 향기로운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장작을 패거나 눈을 치우는 것이죠.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강한 ‘큰 스님’이라는 말에 그는 늘 손사래를 치곤 했습니다. “큰 스님? 그럼 작은 스님도 있는가? 대추기경이 있고 소추기경이 있고 그런 건가?”

하지만 그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일암 시절 그를 찾아온 한 프랑스 철학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살고 계신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땐 “나도 모른다. 내 식대로 살 뿐이다”고 대답했지만 그 질문이 그 후에도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얻어들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야 되겠구나.’ “그런데… 그러고 나서 예전에 쓴 글들을 보니까 참 치기만만합디다.”

오래도록 법정 스님 곁에서 수행을 지켜 본 시인 류시화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보름달이 건너편 산 위로 떠오르자 스님께서 ‘기도하자’고 하시더군요. 기도하고 나서 스님께 어떤 기도를 하셨느냐고 여쭸지요.” 스님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

스님은 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바다에서 오래 살면 바다를 닮고, 산에서 오래 살면 산을 닮는다고 말입니다.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50년 동안의 수행 끝에 스님이 이른 곳은 과연 어디인지 물어봤습니다.

“그저 ‘현재의 나’일 뿐입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요. 연륜 값을 하고 있는 건지, 수행자답게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고, 함부로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요.”

오랜 칩거 생활에서, 법정 스님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돼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고독해야 마음이 투명하게 맑아질 수 있지만 고립은 단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은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얼마나 주변 이웃에게 덕(德)을 베풀었는지가 중요해요. 바로 덕이야말로 사람의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덕을 쌓을 줄을 모릅니다. 잘 살고 편리해도 덕이 없으니 외롭고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이죠. 무슨 일을 하든 이웃에 덕이 되는 따뜻한 가슴과 포용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서만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에 법정 스님은 입적했습니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참으로 법정다운 말을 남기고 말입니다.

2010년 3월 13일 오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열린 법정 스님의 다비식. 조계산 계곡을 가득 메운 추모객들이 눈물 지으며 합장한 채 불꽃 속에 사라지는 스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범우사에서 나온 수필집 ‘무소유’를 읽었을 때, 봉은사 가려면 한강을 배로 건너야 하는데 선착장에 도착해 보니 배가 막 떠나 안타까울 때 ‘내가 너무 일찍 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얘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글에서는 ‘자다가 중간에 깨어나면 그대로 일어날 것이지 왜 다시 잠을 청하는가’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제가 감탄만 하고 여태 실천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법정 스님의 본래 성격은 성마르고 거칠며 다급한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인과 다른 점은 끊임없는 수도(修道)를 통해 그것을 억눌렀다는 것입니다. 그가 좌파 지식인 노릇을 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그것은 일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더 심한 비난을 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죠.

그가 없는 세상을 14년이나 살아보니, 이제서야 분명히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조차 없는 세상이란 참으로 삭막하고 황량하다는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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