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물리학자인 박영재(69) 서강대 명예교수는 50년째 간화선(看話禪) 수행을 해오고 있다. 1975년 서강대 물리학과 2학년 때 수행을 시작해 대학원을 거쳐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지금까지 매일 아침·저녁 1시간씩 좌선을 한다. 대학 2학년 때 재가자들의 수행 모임 ‘선도회(禪道會)’를 이끌던 종달 이희익(1905~1990) 노사(老師)를 만나 간화선 세계에 입문한 그는 1987년 스승에게 인가(印可)를 받았다. 1990년 스승의 입적 후에는 2대 지도 법사로 회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선도회 회원은 교수, 교사, 사업가, 예술가, 종교인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선도회 회원들은 하루 8분의 1은 좌선 수행, 나머지 시간은 본업에 충실[坐一走七]한, 생활과 수행이 분리되지 않는[生修不二] 것을 지향한다.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하루를 부리자”는 신조로 수행하는 박 교수를 지난주 서울 행촌동 수행 공간인 정안헌(正眼軒)에서 만났다.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하셨는데, 처음 참선 수행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대학 입학 후 1년간 방황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타’를 읽고 인간 석가세존의 체취에서 자유로움을 느꼈고, 아함경에서 ‘독화살의 비유’를 읽고 ‘지금 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2학기 개강 후 불교 학생회인 혜명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불교학생회에서 간화선을 만나셨나요?
“학생회 선배가 선도회 종달 노사님을 안내했습니다. 서울 세검정 불심원(佛心院)에서 열린 선도회 모임에 참가했는데, 스승님이 맨 뒷자리에 앉은 저에게 다가오셔서 자세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제 삶의 새로운 장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수행을 어떻게 지도하시던가요?
“처음엔 호흡을 하면서 숫자를 세는 수식관(數息觀)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고, 처음으로 돌아와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향(香) 한 대가 탈 동안(약 1시간) 그렇게 했습니다. 매주 한 번 모임에서 지도받고 집에 와서도 시간 날 때마다 수식관을 했더니 6개월쯤 지나자 집중력이 확실히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번 본 것은 각인된 것처럼 잊어버리지 않게 됐고, 평소 5시간 공부할 내용도 1시간 반이면 끝냈고요. 덕분에 3학년 때는 1,2학기 모두 4.0 만점을 받았어요.”
-4학년 때는 만점이 아니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웃음). 1년을 원 없이 공부하고 나니 그 후로는 ‘학점에 연연하지 말자’ 생각하게 됐지요. 수행을 한 후로 뭔가에 끌려다니는 데서 자유로워지니 갈등이 없어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집에서도 계속 좌선을 하니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가 6개월 정도 지켜보시다가 ‘그게(참선) 뭔지는 몰라도 네가 긍정적으로 변해서 좋다’고 하셨어요. 스승님 지도를 받으며 화두 참구도 함께했는데 한 1년쯤 지나니 선 수행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수행을 계속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수행한 지 5년쯤 됐을 때는 과거 같으면 한 달쯤 가슴에 답답하게 맺혔을 일들이 일주일이면 사라지게 됐습니다. 한 10년쯤 지나니 힘든 일이 닥쳐도 그 일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고 지금까지 스트레스 제로(0)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과학자로서 수행과 연구 생활이 충돌하지는 않았습니까.
“대학원 1학년 2학기 때 교수님이 과제를 주면서 1주일 안에 풀어 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끙끙대도 풀리지를 않아요. 마침내 마감 날 새벽에 눈을 뜨는데 아이디어가 딱 떠올랐어요. 1주일 동안 화두를 풀듯이 매달린 덕분이죠. 그때 선승들이 선방(禪房)에서 화두를 드는 것과 전문가들이 자기 일에 몰입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또 수행을 하면서 연구에 탄력이 붙어서 퇴임 때까지 SCI급 논문을 177편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선도회는 ‘좌일주칠(坐一走七)’이란 원칙이 있다고요?
“송나라 때 원오극근 선사의 어록에 있는 말씀입니다.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과 수행이 하나인 ‘생수불이(生修不二)’를 추구합니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 수면과 식사·이동 시간 등을 뺀 시간 중 8분의 1은 좌선하고 나머지는 본업을 충실히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오늘 하루를 부리자’고 표현합니다. 원래 선가(禪家)의 핵심은 상속(相續)입니다. 이때 상속은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몰입한다는 뜻입니다.”
-하루 중 수행을 어떻게 하십니까.
“아침 6시 전후 눈을 뜨자마자 다리를 틀고 앉아(반가부좌) ‘오늘도 한 가지 선행(善行)을 하고, 한 가지 집착을 버리자’ 등 네 가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구나 하루 한 가지 선행과 집착 버리기는 할 수 있잖아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기도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이후 1시간 정도 좌선하며 화두를 살핀 후 오늘 해야 할 시급한 일을 새기며 ‘오늘도 일과에 온몸을 던져 뛰어들기’를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길가의 쓰레기를 ‘나의 선행을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쓰레기가 보이면 바로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지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주변에 쓰레기가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업무에 집중합니다. 일과 후에는 버스와 전철로 귀가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 겸 눈을 감고 호흡하면서 ‘수식관’에 집중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침에 계획했던 일을 제대로 했는지 되돌아봅니다. 만약 누구와 다툰 일이 있다면 ‘내일은 화해해야지’ 다짐하고 낮에 응어리진 일이 있다면 풉니다. 미처 착한 일을 하지 못했다면 자기 전에 1000원이라도 저금통에 넣고 마지막으로 ‘참나 찾기’ 기도문을 염송하고 수식관을 하면서 잠이 듭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 날)이란 말 들어보셨죠? 수행을 지속하다 보면 월월시호월(月月是好月), 연년시호생(年年是好生) 하면서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멋진 인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선도회와 입실점검
1965년 종달 이희익 노사가 일반인(재가자) 간화선 수행을 위해 만든 모임. 남송 시대의 ‘입실점검(入室點檢)’의 전통을 잇고 있다. 입실점검은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마주 앉아 화두를 점검하는 방식. 큰 방에서는 수행자들이 좌선하며 화두 참선을 하는 가운데 종소리가 울리면 순서대로 한 명씩 지도 법사가 있는 방에 들어가 마주 앉아 수행의 진전을 점검받는다. 점검받는 시간은 처음에는 20~30분도 걸리지만 수행이 무르익음에 따라 불과 1분 안팎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지도자가 구체적으로 개인의 수행 정도를 점검한다는 뜻에서 선도회 수행의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여긴다. 또한 다른 수행자를 지도할 수 있는 법사를 양성하는 것도 선도회의 중요한 목표이다. 이희익 노사 생전에 박영재 교수를 비롯해 김인경 조선대 미대 교수 등 10명이 법사로 인가받았고 박 교수가 제2대 지도 법사를 맡은 후에도 심상호 정신과 의사 등 23명이 법사로 인가받았다. 성철 스님의 선 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예수회 서명원(전 서강대 교수) 신부는 선도회에서 수행해 법사로 인가받아 국제 거점 모임의 지도 법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회로 개칭하고 통찰(깨달음)과 나눔(보시)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