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생명평화 탁발 순례에 나설 당시의 수경 스님. /김영근 기자

#장면 1. 밀물에 갇혀 외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칠흑 같은 밤, 충남 서산 간월도 앞 개펄에서 젊은 사미(예비 승려)는 목이 터져라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1960년대말의 어느날이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사미는 은사 스님을 모시고 간월암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당시 간월암은 작은 바위섬에 있는 암자였습니다. 썰물 때는 인근 부석면 강당리 마을로 개펄 15리 길을 걸어 탁발(托鉢)을 나가 쌀을 얻어 짊어지고 다시 걸어왔답니다. ‘그날’은 밤에 은사 스님이 갑자기 ‘나가자’며 사미와 함께 간월암을 나섰답니다. 달도 없는 그믐날이었답니다. 그럴 때 ‘등대’는 밤새 외등을 켜놓는 강당리의 한 집이었다고 하네요. 그날도 그 불빛을 등대 삼아 개펄을 걷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고 합니다. 정상적이라면 불빛이 하나만 보여야 하는데, 한참 걷다보니 불빛이 여러 개 보였다지요. 바다에 떠있는 어선들의 불빛이었습니다. 길을 잘못 든 것이지요. 개펄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사 스님은 ‘맞는다’고 하고 사미는 ‘아니다’고 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 나중엔 거의 몸싸움까지 벌였답니다. 말 그대로 ‘진흙탕 싸움’이었지요. 그러는 사이 밀물은 점점 차오르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사미의 뇌리엔 퍼뜩 ‘관세음보살’이 떠올랐답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거듭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없던 힘이 생기고 노장님을 끌고 가까스로 개펄을 벗어났답니다. 갯고랑에 들어설 무렵엔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고 합니다. 그 사미는 “그때,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죽을 경우에도 살길이 열린다는 것을 사무쳐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은사 스님은 그 후 그를 간화선(看話禪) 수행으로 이끌며 “관세음을 염하든 화두를 들든, 일념이 되면 이루어진다. 화두 일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진해라.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면 된다”고 말씀했답니다.

수경 스님의 책 '기도' 표지.

이 일화는 최근 출간된 ‘기도’(엘도브출판사)라는 책에 실렸습니다. 에피소드 속의 사미는 수경(75) 스님, 책 날개에 실린 스님에 대한 설명은 간단합니다.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화계사 주지 역임. 현 (사)세상과함께 한주.’ 수경 스님은 일반적으로는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2003)와 한반도 대운하 백지화를 위한 오체투지(2008)로 알려졌지요. 사실 수경 스님은 선승(禪僧) 출신입니다. 1967년 수덕사로 출가한 이후 30년 이상 봉암사를 비롯한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참선수행에 정진한 스님입니다. 그러다 2000년 ‘지리산 댐 건설 문제’를 계기로 불교환경운동에 나서게 됐지요. 그렇게 불교환경운동에 앞장서던 수경 스님은 지난 2010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문수 스님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소신공양(분신)한 직후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며 조계종 승적(僧籍)까지 반납하겠다며 사라졌지요. 그랬던 스님은 지난 3월 ‘불교평론’ 봄호에 ‘불교환경운동을 위한 제언’이란 기고를 실었지요.(본지 3월 14일자 보도) 그 기고문에서도 스님은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기고문에 이어 이번에 나온 책은 제목 자체가 ‘기도’입니다. ‘활동재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권하는 듯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수경 스님이 생각하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장면2. “선승(禪僧)이라며 웬 염불이냐?”

2006년 서울 화계사 주지를 맡은 수경 스님은 일종의 ‘기도운동’을 펼쳤답니다. 사시(巳時·오전 9~11시) 예불 후에 30분~1시간씩 신도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법문하고 “기복(祈福)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기도가 깊어지면 마음의 길은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오로지 이기심으로 기도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적나라한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므로 참회가 수반되게 마련”이라고 강조했답니다. 사찰로서는 드물게 타태(墮胎·유산이나 낙태) 아기 영가천도를 위한 기도도 올렸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르는 스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답니다. 어느 선방의 선원장이라는 그 스님은 대뜸 “선승이라면서 어떻게 염불이나 하고 있냐”고 경멸조로 힐난했답니다. 참선이 염불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린 말이었지요. 스님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지만 편협한 간화선(看話禪) 우월주의와 깨달음 지상주의를 재확인한 것이 씁쓸할 따름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장면 3. 눈[雪]에 파묻혀 죽기 직전의 참선

한창 기운 좋던 30대 초반에 수경 스님은 도반 대여섯 명과 충남 부여군 월명산 정상 밑의 암자에서 동안거를 지낸 적이 있답니다. 어느날 속이 안 좋아져 열흘 간 단식을 했는데 기운이 떨어져 도저히 정진을 이어가기 힘들었답니다. ‘단식 후엔 꿀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눈길을 헤치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꿀은 구했는데 다시 암자로 오르는 길이 문제였습니다. 단식 후유증 때문에 기운이 없는 상태에서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오르다 그만 탈진하고 말았답니다.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혼절했다가 깨어난 그는 ‘여기서 죽자’고 다짐하고 눈을 치우고 좌선하듯 앉았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죽기로 마음 먹으니 화두가 잘 들리더랍니다. 그렇게 죽을 뻔한 스님은 도반 스님들이 발견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수경 스님은 “화두든 염불이든 된다, 안 된다는 생각 속에서는 일념이 되지 않는다.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격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

#장면 4. 한 할머니의 49재

경북 문경 묘적암이라는 암자에 살 때 일이랍니다. 한 됫박쯤 되는 쌀을 이고 온 할머니는 대뜸 “아들 49재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군대 가서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인데, 아들이 눈에 밟혀서 견딜 수가 없다면서. 집 근처 절에 갔더니 ‘부처님 앞에 절하고 가면 된다’고 하고, 어느 암자에 갔더니 ‘이곳은 선방(禪房)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49재를 지낸다’고 해서 발길을 돌려 묘적암을 찾아왔다는 것이죠. 수경 스님은 “할머니, 여기가 바로 49재 전문 절입니다”라고 하고는 분유를 한 잔 타드리고 “마을로 내려가서 장을 봐 올 때까지 먼저 49재를 지내고 계시라”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49재라는 건 할머니와 죽은 아들과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서 부처님께 매달리는 겁니다”라고 설명하며 ‘관세음보살님’만 부르라고 했답니다. 스님은 산 아래 마을까지 4시간을 걸어서 사과 몇 알을 사오니 밤 11시가 넘었는데 할머니는 꿇어앉은 그 자세 그대로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고 있었답니다. 할머니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더니 “스님,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홀연히 사라졌답니다. 삼매에 들어 관세음보살과 온전히 하나가 됐던 것이지요. 얼마 후 할머니가 사는 인근 마을까지 ‘할머니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스님이 찾아가 만났더니 할머니는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반갑게 맞았답니다. 할머니는 아들 49재 이후로 무슨 일을 할 때든 관세음보살을 부른 것이고, 사람들은 그걸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스님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하며 “기도란 이런 것. 간절하면 통하는 법”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사를 보면 많은 사람이 하는 일마다 안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춰 놓고는 무조건 되기만을 빕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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