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양동교회 출입문 위에 '대한융희4년'이란 글씨와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김한수 기자

예배당 좌우 문 위엔 아치형 장식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아치에는 돌에 새긴 글씨와 문양이 있었습니다. 한쪽 문 위에는 ‘쥬강생일쳔구백십년(主降生 1910년)’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반대편 문 위에는 ‘대한융희사년(大韓隆熙四年)’이 적혀 있었습니다. 융(隆)자와 희(熙)자 사이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태극 문양이 돋을 새김으로 선명했습니다.

목포양동교회에서 한교총 이철 공동대표회장과 이 교회 강귀원 장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회 출입문 위에 '주강생 일천구백십년'이라고 적혀 있다. /김한수 기자

지난달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호남 근대 기독교문화유산 탐방’에 참가해 방문한 전남 목포 구도심 목포양동교회 예배당은 1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단단한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당시 탐방 후 신문에 쓴 기사는 주로 6·25때 희생된 전남 영광·신안 지역 교인들의 순교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사연은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신안군의 그 많은 섬을 배를 타고 오가며 전도에 나섰던 문준경 전도사 스토리도 그렇고요. 그 당시 지면 사정 때문에 함께 다루지는 못했지만 목포양동교회와 공생원 스토리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은 양동교회와 공생원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목포양동교회는 구도심 주택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목 입구에서 교회를 보면 저절로 고개를 들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 역시 후손들이 우러러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양동교회는 유진벨 선교사와 레이놀즈 선교사가 1897년 목포에서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설립됐습니다. 교회 마당엔 놓인 비석과 안내판은 이 교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처음 터’ ‘목포 양동교회-3·1운동 만세 시위지’ ‘순교자-박연세 목사(1926~1942)’ 등입니다.

목포양동교회 내부. 100평 공간에 시야를 가리는 중간 기둥이 하나도 없이 뚫려 있다. /한교총 제공

1910년은 경술국치로 우리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해였지요. 어떻게 문 위의 태극 문양과 대한제국 연호가 일제 35년 동안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교회를 안내해주신 강귀원 장로님은 “이 문 위에 등나무 넝쿨이 있었는데, 등나무 넝쿨에 태극문양이 가려진 덕분에 일제강점기에도 철거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배당은 110여년의 역사가 무색하게 튼튼했습니다. 예배당 실내는 100평이 넘는 공간인데 중간에 시야를 가리는 기둥이 하나도 없이 탁 트여 있었습니다. 원래는 예배당 앞에서 뒤로 천장 가운데 부분에 휘장을 걸 수 있는 고리들이 있었답니다. 남녀 신자의 자리를 나누는 휘장이었답니다. 강대상에서 신자석을 봤을 때 오른쪽은 남성, 왼쪽은 여성 좌석이었다지요. ‘융희 4년’이 새겨진 문은 남성, ‘주강생’이 새겨진 문은 여성 출입문이었고요.

저는 이 예배당 실내를 보면서 서울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떠올랐습니다. 중앙대교당은 약 200평 규모인데 실내엔 시야를 가리는 기둥이 없습니다. 중앙대교당이 준공된 때는 1922년입니다. 천도교가 교단 차원의 역량을 집결해 건축한 건물로 준공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10년 이상 앞서 준공된 목포양동교회 예배당이 중간 기둥이 없이 100여평 규모로 세워진 것이니 당시 교인들의 자부심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됐습니다.

목포양동교회 마당에 있는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처음 터' 비석. /김한수 기자

그런 자부심은 양동교회가 목포 3·1운동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목포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8일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교회 인근 미션스쿨인 영흥학교 학생이 오전 10시경 양동교회의 종을 치면서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과 양동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돼 만세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당시 목포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해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해 배포했다는 것입니다. 양동교회 예배당 반지하실은 현재는 ‘역사 자료실’로 개조돼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목포 3·1운동을 알렸던 과거의 종탑이 남아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목포 공생원을 세운 윤치호와 윤학자 동상 앞에 선 맹현숙 원장, 이철 한교총 공동대표회장, 이연 공생복지재단 상임부회장(왼쪽부터). /김한수 기자

양동교회를 떠나 유달산 자락의 ‘공생원’에 거의 다다를 무렵 저 멀리 벽에 붉은색 학(鶴)과 JAL(일본항공)이란 로고가 적힌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속으로 ‘공항에 가까운 지역도 아닌데 웬 JAL 건물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의문은 공생복지재단 이연 상임부회장의 설명을 듣고 풀렸습니다. 일본항공이 1971년 공생원에 이 ‘JAL하우스’를 지어 기증한 것입니다. JAL하우스에서 보듯이 ‘공생원’은 한일 우호의 상징입니다. 공생원 마당에는 오부치 게이초 전 일본 총리가 기증한 매화나무도 있습니다. 오부치 전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남긴 정치인이지요.

목포 유달산 아래 공생원이 자리하고 있다. 공생원 뒤로 일본항공이 1970년대초 기증한 'JAL하우스'가 보인다. /김한수 기자

공생원은 양동교회 전도사로 사역한 윤치호(1909~1951 실종)가 1928년 부모 잃은 아이들을 데려와 키우면서 세운 복지시설입니다. ‘거지 대장’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윤치호는 1938년 일본인으로 정명여학교 교사였던 다우치 지즈코(1912~1968) 여사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크리스천이란 공통점이 있었지요. 다우치 여사는 결혼 후 남편의 성(姓)을 따라 ‘윤학자’로 개명했습니다.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들도 공생원 고아들과 똑같이 키웠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공생원 원아들의 모습. /공생원

광복 후에도 한국에 남아 고아를 돌본 윤학자 여사는 1951년 6·25 전쟁 중에 윤치호가 행방불명된 후에도 혼자 고아들을 돌봤습니다. 1968년 11월 윤학자 여사가 별세했을 때 영결식은 첫 목포시민장(葬)으로 치러졌답니다. 당시 16만 시민 중 3만명이 영결식장에 운집했다고 하니 얼마나 목포시민의 사랑을 받았던 분인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지금도 공생원은 목포와 제주 등 한국에 11곳, 일본에 5곳의 시설을 운영하면서 한일우호의 살아있는 상징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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