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제5공화국 시기는, 역설적이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5공을 거치고 나서야 한국 국민은 비로소 군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유일한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28일 연구실에서 만난 강원택(6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새로 낸 500여 쪽 분량의 연구서 ‘제5공화국’(역사공간)에 대해 말했다. 학문적으로 여전히 사각지대에 남아 있는 5공의 정치사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왜 민주화가 왜 1979년에는 불가능했고 1987년엔 가능했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연구다.
“10·26은 권력 내부의 파열이었을 뿐 대중이 저항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관료와 군부라는 유신 체제의 구조적 힘은 여전히 건재했죠.” 최규하·신현확의 유신 관료 집단과 정승화의 구(舊)군부 사이 협력이 유지됐더라면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이원정부제 형태로 헌법이 개정될 수도 있었으나, 12·12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한 뒤 모든 권력을 빨아들였다.
강 교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실패한 원인을 전두환 1인의 권력욕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고 했다. ‘피해자’로 인식된 최규하 대통령은 그가 보기엔 신군부에 의존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노렸고, 야권 지도자 김영삼·김대중은 지나친 낙관주의와 분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국민 대다수는 유신 체제를 힘들어하면서도 정치적 변혁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5공 시기를 거치며 세 가지 큰 변화가 생겨났다. “1987년 6월 항쟁만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첫째,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정부와 군부가 더 이상 물리적 강제력으로 시위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둘째, 1985년 2·12 총선으로 약진한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셋째, ‘탄탄해진 중산층’이 더 이상 권위주의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중산층 성장의 배경에는 최고 13.4%(1983)까지 올랐던 경제성장률, 물가 안정과 경상수지 개선, 도시화와 교육열이 존재했다. 올림픽 유치와 함께 5공 정부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모두 ‘민주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5공 정부의 억압적 통치의 결과 사회운동권 세력들 중 일부가 종북 성향을 띠거나 기존 사회 질서를 뒤집으려는 극단주의로 나아간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남긴 또 다른 나쁜 유산”이라고 강 교수는 말했다. 그는 “제5공화국을 암흑과 저항의 시기로만 볼 게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민주화를 위해 달려온 숨 가쁜 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