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선교사 브뤼기에르 주교를 아시나요.
최근 천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조한건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 바로 알기’(생활성서)란 책을 펴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작년부터 김수환(1922~2009) 추기경과 한국순교복자가족수도회 설립자 방유룡(1900~1986) 신부 그리고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의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은 시복시성 추진에 맞춰 일반인과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기 위해서 출간됐습니다.
저는 종교를 담당하면서 몇 차례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기사를 썼지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보다 자세히 그 분의 업적을 알게 됐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태생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아시아 선교에 나섰다가 최초의 조선 대목구(代牧區) 책임자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오던 중 네이멍구 지역에서 선종한 분입니다. 자신의 임지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도중에서 과로사했기 때문에 ‘순교자’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보면 이 분이 왜 시복시성의 대상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모두가 조선에 대한 선교사 파송에 대해 “안 된다”고 반대할 때, 혼자 “내가 하겠습니다”라며 나선 분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업적을 살피기 위해선 먼저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정세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알려진대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지요. 청나라도 건륭제(재위 1736~1795) 연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요. ‘황제의 신민(臣民)이 되려면 오고, 로마 교황의 지시를 받으려면 오지 말라’는 것이었죠. 청나라는 천주교 선교사를 사형시키지는 않았지만 명나라 말기 마테오 리치 등이 활동하던 시절에 비해서는 선교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지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는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습니다. 조선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30년간 ‘목자 없는 시대’였지요. 1810~1820년대 조선의 신자들은 북경 주교를 찾아가 사제의 조선 파견을 거듭 요청했습니다. 당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이자 후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되는 카펠라리 추기경은 1824~1825년 무렵 이 편지를 접하고 유럽의 선교회들에게 이런 내용을 전하며 선교를 제안했답니다. 먼저 제안을 받은 곳은 예수회. 그러나 예수회는 1773년 해산됐다가 1814년에 복권돼 재건 중이어서 여력이 없었지요.
다음으로 제안을 받은 곳이 파리외방전교회입니다. 그러나 파리외방전교회도 조선 선교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공동서한’을 발표해 아시아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서한의 내용은 ‘인원 부족’ ‘경비 부족’ ‘조선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 등을 들며 부정적인 내용이었답니다. 중국에서도 선교가 어려웠으니 이런 부정적인 의견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브뤼기에르 신부는 달랐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원래 26세 때 남불(南佛) 카르카손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난 사제였답니다.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33세의 나이에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양성교육을 받았습니다. 1826년 동아시아로 떠나 시암(태국)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교황청의 조선 선교 계획은 그가 태국에 있을 때 발표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황청의 요청을 받은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각지의 선교사들에게 ‘공동서한’을 보내 교황청의 요청 사실을 알린 것이죠.
1829년 5월 19일 브뤼기에르 신부는 ‘공동서한’의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습니다. 일손 부족에 대해선 ‘이것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이유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없다’고 했고,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이 많다’는 이유엔 ‘저 불쌍한 조선 사람들의 경우만큼 절박하지는 않다’고 반박했습니다.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이유에 대해선 ‘북경에서 출발한 중국인 신부는 과업을 완수했는데, 사천(四川)이나 산서(山西)에 파견된 유럽인 신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라고 특별히 명령하셨을 때에 조선을 빼놓으셨습니까?”라고요.
마지막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지막 이유가 남아 있습니다. 포교성성에는 장래에 관해서 아무런 약속도 하지 말고, 지금 당장으로는 신부 한두 명 정도를 보내겠다고 제안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위험한 사업을 기끼어 맡고자 하는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조한건 신부는 “이 한 통의 편지는 조선 선교의 불투명성을 완전히 역전시켰다”고 적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자원하고 나서자 교황청은 다음달인 1829년 6월 29일 그를 주교로 서품합니다. 이어 1831년 조선 천주교를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킵니다. 조선 대목구를 신설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지요. 말레이시아 페낭의 신학교에 근무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조선대목구장 임명 사실을 통보 받고 조선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조선까지 이르는 길은 너무나 험난했습니다. 1832년 8월 페낭을 출발해 마닐라, 마카오, 중국 복건성, 절강성, 산동성, 산서성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내몽고의 교우촌(敎友村)에 도착한 때가 1834년 10월이었습니다. 2년이 넘게 걸린 것이죠. 이듬해인 1835년 ‘서만자’라는 교우촌에서도 체포령을 듣고 피신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답니다. 이러는 사이에 그의 건강은 많이 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가 부었다가 가라앉는 증세와 두통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는 1835년 10월 ‘마가자’라는 교우촌으로 옮기지만 이곳에서 10월 20일 만 43세의 나이로 선종하게 됩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중국식으로 머리카락을 다듬은 그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고 쓰러져 프랑스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외치고는 의식을 잃었고 선종했습니다. 현지에 매장된 주교의 유해는 1897년 흑사병 연구를 위해 현지를 방문했던 프랑스 의사에 의해 발견돼 1931년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조선으로 이장됩니다. 현재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돼 있지요. 또한 그의 묘비도 2006년 발견됐습니다. 문화혁명 기간 파괴될 것을 걱정한 신자들이 옮겨놓았던 것이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이지요.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록 조선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겠습니다”라는 그의 다짐은 파리외방전교회 후배 선교사들로 이어졌고 현재 한국 천주교는 16개 교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는 ‘순교자’는 아니지만 ‘온 삶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교회에서 덕행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증거자’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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