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간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60대 후반에 목회자가 돼 탈북민 지원활동을 벌이는 장기호 목사.

성직자 가운데에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성직의 길로 접어든 분들도 많습니다. 개신교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이전의 사회 생활 경험이 목회 활동에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외교관 출신으로 탈북민을 돕는 사역을 하는 장기호(79) 목사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장 목사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5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2007년까지 36년 간 외교관 생활을 했던 분입니다. 아일랜드와 캐나다, 이라크 주재 대사를 역임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보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장 목사에게 들은 아일랜드 대사 시절(1998~2001)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봉사 활동을 한 후 아일랜드로 귀국한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사관저로 초대해 매년 만찬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아일랜드에는 성(聖)골롬반외방선교회(골롬반회)가 있습니다. 1916년 설립된 골롬반회는 초기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했고, 1933년부터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견했습니다. 골롬반회는 한국에서 90년간 260여명의 선교사가 활동했지요. 주로 광주·전남과 강원도, 제주도 등에서 활동하며 국내에 성당 130개를 세웠습니다. 제주도 성(聖) 이시돌목장을 만든 패트릭 제임스 매그린치 신부, 광주광역시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동체 무지개공동회를 만든 천노엘 신부(2015년 만해대상 실천대상 수상) 등이 골롬반회 선교사들입니다. 주로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앞장섰지요. 골롬반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선종해 묻히기도 했지만 은퇴 후엔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가 본부에서 지내는 경우도 많지요. 장 대사는 이 분들을 초대했던 것이지요. 마치 6·25전쟁에 참전한 노병들을 초대해 보은행사를 갖는 것처럼 노(老)선교사들이 한국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정도 많고 유쾌해 우리나라 사람들과 성격이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만찬 자리에 음료수, 맥주, 와인, 위스키 등을 준비해 놓고 장 대사가 “어떤 음료로 건배를 할까요?” 물으면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위스키 퍼스트!”를 외쳤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만찬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늦도록 이어졌다고 하네요. 시간이 늦어져 장 대사가 “오늘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에 다시…”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려고 하면 노 선교사들은 대뜸 물었답니다. “다음? 언제?”라고요. 막연하게 ‘다음’이라고 하지 말고 바로 날짜를 잡아놓자는 것이었죠. 노 선교사들은 그렇게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대사관이 마련한 만찬을 고마워했답니다.

주이라크대사 시절 자이툰 부대를 찾은 장기호 목사(왼쪽). /장기호 목사 제공

장 대사가 목회자로 제2의 인생을 꿈꾸게 된 것은 2004~2007년 이라크 대사 시절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임할 때는 김선일씨 피살 사건과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 직후였습니다. 상황은 엄혹했습니다. 부임하던 날 공항에서 대사관까지 방탄복을 입고 차창 밖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부임 다음날 새벽엔 대사관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벌어져 대사관 유리창이 다 깨지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외출 때에도 경호차량까지 차량 6대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할 정도였고요. ‘죽음의 그림자’가 늘 곁에 따라다니던 그곳에서 그는 자연히 하나님을 찾게 됐다고 합니다.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당시 오히려 마음은 평화로웠다. 주님에게 의지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주님 안에서 평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감했다”고 하지요.

그는 귀국 후 목회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장신대 평신도대학원 2년에 이어 총신대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 때는 1년 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였지요. 20~30대 대학원생들과 함께 헬라어(그리스어), 히브리어 기초부터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기숙사 생활이 힘들었답니다. 무엇보다 새벽에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이 미안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를 부탁해 6개월 정도 지냈지만 그것도 미안해서 결국 2학기에는 학교에 부탁해서 ‘새벽 기도에 빠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학교 앞에 방을 얻어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겪고 목사가 된 그는 서울 강남의 한 건물을 일요일에만 빌려 예배를 드리는 강남엘림교회를 개척하고 강남엘림문화원을 열었습니다. 매년 탈북민을 위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장기호 목사가 이끄는 강남엘림문화원이 지난달 서울구치소를 찾아 예배와 음악회를 개최했다. /장기호 목사 제공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하나님을 찾게 됐더라도 목회자가 아닌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 수도 있었겠지요. 장 대사는 왜 목사 안수까지 받고 목회자가 됐을까요. 그는 ‘더 낮은 자를 섬기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더 낮은 자’는 우울증 환자, 재소자, 노숙인 그리고 탈북민 등이었습니다. 우울증 환자와 노숙인, 재소자를 찾아 위로하고 돌본 그는 현재는 탈북민을 돕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 후원회 공동대표도 역임했지요. 그는 작년 6월에는 한국기독교탈북민정착지원협의회(한정협)의 4대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2002년 설립된 한정협은 탈북민의 취업·학업·의료 등 국내 정착과 신앙생활을 돕는 단체입니다. 김홍도·김인중·정성진 목사 등 대형교회 목회자가 1~3대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탈북민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가 22일 오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다. 사진은 지난 2018년 음악제 당시 모습.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장기호 목사). /강남엘림문화원 제공

장기호 목사는 올해도 22일 오전 9시30분부터 낮 12시까지 서울 새문안교회 지하2층 언더우드홀에서 ‘2024년 탈북민지원 심포지움과 작은 음악회’를 개최합니다. 올해 행사는 정부가 7월 14일을 ‘탈북민의 날’로 선포하는 것을 앞두고 열립니다. 문승현 통일부 차관과 이영선 통일과나눔재단 이사장도 참석합니다. 2부 예배에서는 이수영 전 새문안교회 담임목사가 설교합니다. 장 목사는 “북한이 남한을 동포가 아닌 교전국가, 적대국가로 규정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탈북민의 날’을 선포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며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22일 행사엔 탈북민 약 2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인데 ‘탈북민 축제의 날’로 만들 것”이라며 “하나님이 탈북민들과 인연을 맺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장 목사의 ‘인생 2막’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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