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모태신앙, 예수회 영신수련, 위파사나, 간화선…. 그의 영적 순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명원(71) 예수회 신부 이야기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의사 아들 소원’에 따라 프랑스 보르도 의대에 진학했던 그는 졸업을 1년 앞두고 예수회로 출가하며 가족의 기대를 ‘배신’했다. 1985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국 불교를 연구해 구산 스님과 성철 스님을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무속인들의 굿판도 따라다녔다. 스스로 ‘영적(靈的)으로 예민, 과민한 성격’이라는 그는 매번 각각의 수행법에 흠뻑 빠졌다. 거기서 빠져나와 스스로 정리하는 것도 오래 걸렸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는 “나의 모국어는 프랑스어, 나의 종교적 모국어는 그리스도교. 수행은 나의 영성을 깊고 넓게 만들어줬다”며 “명상은 ‘순간의 신비’ ‘현실의 신비’를 놓치지 않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서명원 신부를 지난주 경기 여주 ‘도전돌밭공동체’에서 만났다.
-의대생 시절,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350여 구의 시체를 해부하셨다고요.
“의사였던 아버지가 친구분들께 부탁해서 돈 많이 받는 아르바이트로 부검 보조 자리를 소개해주신 겁니다. 부검을 하면 생물학적 사인(死因)을 알 수 있어요. 어떤 경우는 눈으로만 봐도 심혈관이나 뇌혈관 막힌 게 보여요. 그렇지만 아무리 부검을 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어요.”
-무엇인가요.
“죽음 그 자체였어요. 산부인과에서 신생아의 죽음도 봤고, 억울한 죽음도 많았어요. 결국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기(하늘) 올라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없잖아요.”
-죽음에 대한 의문 때문에 예수회로 출가하셨나요?
“의대 5학년 때였는데, 개인적으로 몇 가지 문제로 위기였어요. 가족들은 ‘돌아와 캐나다 의대에 편입하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전문의가 되려면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한 여인을 짝사랑하고 있었고요. 1979년 4월입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보르도에서 기차로 8시간 걸리는 리옹의 예수회 수도원에 피정을 갔어요. 하루에 네 번씩 지도 신부를 만나 상담하면서 ‘제 길을 명확하게 해달라’고 엄청나게 기도했어요.”
-기도의 응답은 어떤 것이었나요?
“7일째 되던 날부터 사흘간 연속적으로 결정적 체험을 하면서 세 가지를 결심했어요. ‘수도자가 되겠다(7일째). 예수회다(8일째). 지금이다(9일째).’ 벌써 45년 전 일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남들은 ‘큰 실수다’, 부모님은 ‘돈 날렸다’ ‘우리를 속였다’고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어요. 예수회 입회를 결심하고 그동안 공부하던 의대 교재와 청진기, 혈압계까지 모두 트렁크에 싸서 배로 부모님께 부쳤어요. 어머니는 ‘네 관(棺)이 도착했다’고 했지요. 저는 그때부터 가족들에겐 죽은 사람이었어요. 당시 주변에서는 저에게 봉쇄수도원이 맞을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산꼭대기가 아니라 세속 한가운데서 살면서 모든 일상이 기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 예수회를 선택했어요.”
-한국엔 1985년에 오셨지요? 처음엔 무당들을 따라다닌 적도 있다고요.
“선교사로 왔지만 먼저 한국 문화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당들은 자신만의 신(神)을 모시고 있더군요. 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리스도의 영(靈)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영적으로 자유로워졌어요. 영적인 길이 엄청 넓어졌다고 할까요.”
-한국 불교에 대해선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제가 무속인을 따라다닐 때 예수회 선배 한 분이 ‘한국 무속에 대해서는 (서양에서) 연구하는 사람 많으니 한국 불교를 공부해라’ 권했어요. 그 선배는 ‘스리랑카 스님이 쓴 불교 책자를 외워라, 당시 제가 맡던 서울 정릉3·4동의 모든 사찰을 방문해서 친한 스님을 만들어라, 인도에 꼭 가보라’는 것이었어요.”
-인도 불교는 언제 체험하셨나요?
“1990년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프랑스로 신학 공부하러 가는 길에 인도에 들렀지요. 고엥카 센터에서 10일간 하루 11시간씩 위파사나를 집중 수행했어요. 뼈를 깎는 수행이었죠. ‘예수쟁이’ 입장에서는 충격도 받았어요. 수행자들은 몸의 감각과 호흡에만 집중하면서도 깊은 차원의 삼매(三昧)에 들어가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믿어온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은 분열도 느꼈어요. 그때 경험을 소화하고 자기화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험 역시 제가 깊고 넓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제 모국어는 프랑스어이고, 저는 예수쟁이이니까요.”
-간화선(看話禪)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천달(天達)이란 법명까지 가지고 계시는데요.
“1994년 파리7-드니 디드로 대학에서 구산(九山) 스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파리에 있던 5년 동안 인도 고엥카 센터에서 배운 위파사나 수행을 계속했지만 한국에서는 주류인 간화선 수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예수회가 운영하는 서강대 물리학과 박영재 교수님이 선도회라는 단체를 통해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고 있어서 참여했습니다. 박 교수님은 개종(改宗)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무료로 자신의 수행 노하우를 다 나눠주셨어요. 각골난망(刻骨難忘)이죠.”
-무속인을 따라다니면서 보니 굿은 ‘돈, 재수, 복’으로 귀결된다고 하셨지요. 기복(祈福)적인 기도와 구분해 진정한 기도와 명상은 절대자, 진리에 주파수를 맞추는 GPS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요?
“모든 종교에는 기복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가 기복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지요. 기복은 자신에게 중심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GPS가 무엇인가요? 내가 가려는 방향을 입력해서 인공위성을 통해 안내받는 거지요? 그런데 목적지를 입력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다른 데서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양심, 진리, 절대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요. 명상의 목적은 최대한 나의 집착을 끊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라고도 할 수 있지요. 성경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출발’이 바로 이 GPS에 주파수를 맞춘 대표적 예입니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 최고의 차원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죠. 주님의 의지대로, 천명(天命) 대로.”
-불교는 ‘공(空)’을 강조하지만 신부님은 ‘나는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운다’고 말씀하시죠?
“비우면 올바르게 채워지니까요. 비운다는 것은 선입견을 비우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비우면 ‘참나’를 찾을 수 있지요. ‘사고방식의 초기화’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상상도 못 했던 나를 계속 발견할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시설(도전돌밭공동체)을 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인연이 생기는 대로 순리(順理)대로 사는 것이지요.”
-순리대로요?
“순리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 순간 주어진 ‘현실의 신비’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우리는 그걸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아요. 불교의 화두(話頭)도 지금 당장 주어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에요. 화두를 가지고 복잡하게 우주선 타고 아주 멀리 가서 답처(答處)를 찾으려고 하는데, 상식을 벗어난 곳에서는 답이 없어요. 순간의 신비, 현실의 신비를 놓친 것은 의미가 없어요.”
-선도회의 국제 거점 지도법사를 맡고 계십니다. 선도회는 ‘아침 1시간 앉은 힘으로 하루를 힘차게 부린다’는 모토가 있지요.
“저도 매일 아침 1시간씩 명상합니다.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영적으로 충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상을 매일 빼지 않고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인데, 좋은 습관을 만드는 거는 힘들어요. 몇 년 걸리죠. 그런데 그 습관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주일도 안 걸려요.”
-명상할 때 ‘조신(操身), 조식(操息), 조심(操心)’을 강조하시죠?
“몸의 자세를 조절하고,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명상의 ABC이죠.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조절하면서 번뇌망상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저는 ‘기차가 지나가는 풀밭에서 풀 뜯어먹는 소가 돼야 한다’라고 해요.”
-무슨 뜻인가요?
“기차가 달려올 때 개는 막 짖으며 열심히 뛰어요. 그렇지만 소는 풀을 뜯으면서 그러려니 쳐다보지요. 지나가는 기차는 내 마음의 흐름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누구나 하루 24시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시간 요리’를 잘해야 하고,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해요. 명상을 하면 생각이 맑아집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선순위를 잘 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꼭 필요한 것을 제때 할 수 있는 것은 지혜이지요.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다양한 영적 경험, 순례를 하셨는데요.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님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게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유대교, 불교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야죠. 그렇지만 저는 저에게 주어진 갈래를 따라야 해요. 저의 종교적 모국어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서명원 신부와 ‘도전돌밭공동체’
서명원(본명 베르나르도 스네칼) 신부는 195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1979년 예수회에 입회해 1985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1992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1994년 구산(九山) 스님에 관한 연구로 석사, 2004년 성철 스님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머물렀던 경기 여주 강천면에서 정년 퇴임 전부터 ‘도전돌밭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도전(道全)’은 원래 이 지역의 이름. 서 신부는 “한국어로 도전(挑戰)과 발음도 같고 우리 공동체의 정신과도 비슷해 ‘도전돌밭공동체’로 이름 붙였다”고 말했다. 밭 800여 평에서 배추, 참외, 옥수수, 토마토, 돌미나리, 고구마, 하지감자 등을 친환경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컨테이너로 지은 공동체 건물 입구에는 ‘기도는 노동이요, 노동은 기도이다’<사진>라는 글귀가 새겨진 현판이 있다. 서 신부는 “모든 일이 기도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