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침 햇살을 싫어하던 소년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꽃밭 속에 숨어서 친구들이 활기차게 떠드는 소리를 듣곤 하는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없던 소년. 국문학 연구자 이강옥(68) 영남대 명예교수다.
이 교수는 본업인 국문학 연구로 성산학술상(1999) 천마학술상(2008) 지훈국학상(2015) 두계학술상(2020) 등 주요 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불교상담학술상도 받았다. 삶의 또 다른 축은 참선 수행이다. 2001년 송광사 수련회를 시작으로 거금도 송광암, 미국 롱아일랜드, 부산 안국선원, 봉화 금봉암, 홍천 행복공장 무문관 등에서 집중 수행한 경험을 숨소리까지 손에 잡힐 듯 정리한 책 ‘깨어남의 시간들’을 펴냈다. 수행 과정에선 특별한 체험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내세우지 않고 ‘보살의 삶’을 서원했다고 한다. 고전 문학 작품을 수행과 명상의 관점에서 접근해 ‘구운몽과 꿈 활용 우울증 수행치료’(2018) ‘죽음서사와 죽음명상’(2020)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참선 수행을 만나면서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불안증과 우울증을 벗어나 행복한 삶을 찾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불안증이 있으셨다고요?
“자주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어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걱정이었어요.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갑자기 발표시키면 어쩌나, 버스를 타면 내려야 할 정거장에 내리지 못하면 어쩌나 같은 걱정. 좀 커서는 내 몸의 온갖 증상에 대해 혼자서 최악의 자체 진단을 내리고 말기암 환자가 되었다가 병원에서 진찰받고 비로소 안도하는 것을 반복하기도 했고요.”
-불교 공부를 만나면서 불안증을 벗어나셨나요?
“대학생 때 불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저는 7남매 중 다섯째이고 아들로는 장남이었습니다. 위로 네 분 누님은 명석했는데 가정 형편 때문에 남동생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느라 공부를 많이 못 하셨어요. 미안함이 있었지요. 누님들 희생 덕분에 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정릉, 의정부까지 10곳 넘게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등 형편은 어려웠어요.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고요. 방학 때는 절에서 지내곤 했는데 그때 혼자서 불경(佛經)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억 나는 구절이 있는지요.
“삼랑진 만어사라는 절에서 지낼 때였는데 ‘반야심경’ 중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구절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온’이란 내 몸과 마음인데 그것이 모두 공(空)하다, 이것이 인정되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즉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엄청난 희망의 메시지였어요. 그러면서 수행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됐습니다.”
-그때가 1970년대 말이었고 첫 사찰 수련회에 참석한 것이 2001년이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대학(서울대 국문학과)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치고 경남대 교수를 거쳐 영남대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제 나름대로 수행하려고 애썼습니다. 영남대 캠퍼스와 대구 집 근처의 산책길 부근에 ‘나만의 바위’를 정해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좌선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아내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칠 때까지 4년간 한국에서 혼자 갓난아기를 키우느라 수련회에 직접 참석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라는 육아일기도 책으로 내셨지요?
“마흔 넘어 아들을 얻은 저로서는 육아가 수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집중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희열, 평화,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 시간도 모자라고 잠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저는 강의는 철저히 하되 끝나면 바로 퇴근해서 육아에 전념했습니다. 아이 자리 옆에 읽어야 할 자료를 펼쳐 놓고 아이가 잠깐 잠들었을 때 자료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불필요한 사회활동을 차단하니까 꽤나 시간이 확보되었고 연구 성과도 확 났습니다. 덕분에 요즘으로 치면 ‘교육부 우수 학자’인 ‘국가 석학’으로도 뽑히고 학술상도 여럿 받게 됐습니다. 육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아침마당’에도 출연하고, 양성평등 교육 강사로 강연도 많이 다녔습니다.”
-아내가 귀국한 후 그렇게 고대하던 송광사 수련회에 참가했을 땐 어땠습니까?
“2001년 송광사 수련회는 경쟁률이 4대1 정도였는데, 그 합격 통보는 어떤 합격 소식보다 더 기뻤어요. 송광사 초입부터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4박 5일간 120명이 함께하는 수련회였는데 ‘이뭣고’ 화두를 주셨어요. 체계적으로 간화선 수행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시간 동안 계속 의심을 일으키는 법을 배워서 집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수행했어요. 그때까지도 조금 남아있던 제 마음의 불안도 수련회 때 다 씻겨나갔어요. 그 후 일상에서 수행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일주일 정도의 수련회에 참가해 재발심하고 기운을 얻어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선생님은 ‘수행과 일상은 분리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간화선 수행을 하면 집중력이 향상돼 일상생활을 지혜롭게 꾸릴 수 있다고 하지요?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공부하기가 즐겁고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던 창의적 아이디어가 막 피어오릅니다. 이기적 계산이 없어지니 오히려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수행을 하면서 연구 성과가 좋아졌지요.”
-선생님은 10년 전 신장암을 겪으셨지요? 수행하는 입장에서 병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에는 어떠셨나요?
“솔직히 흔들렸습니다. 최근에도 종양이 발견됐어요. 진단을 받고 하룻밤 불면을 겪으며 힘들었는데 다 내려놨어요. 수술 날 새벽에 서재와 컴퓨터를 정리하고 봉화 금봉암 고우 스님 법회 촬영한 USB를 정리해두고 병원에 갔어요. 다행히 검사 결과 문제없는 것으로 나왔어요.”
-선생님은 2000년대 초부터 봉화 금봉암에서 고우 스님(1937~2021)의 법문 ‘촬영 기사’와 참석자를 위한 ‘운전기사’를 자처하시지요? 수행 이력을 보면 참선 지도를 하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어떤 분이 ‘당신은 깨달은 것 같은데, 왜 동영상 편집만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어요. 그 말씀을 듣고 ‘지금이 상당히 중요한 때구나. 잘못되면 큰 우(愚)를 범하거나 마장(魔障)에 휩쓸리고 만용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더 치열하게 수행을 하고 자기를 다스리고 있지요.”
-수행을 하면서 일상의 변화가 있습니까. 화를 내지 않는다든지, 부부 싸움을 하지 않는다든지.
“화는 거의 내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요. 부부 싸움도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화를 낼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화내는 것도 양쪽이 부딪쳐서 싸움이 나는데 한쪽이 스톱한다면 싸움으로 가지 않지요.”
-주변에 수행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일단 스스로를 칭찬해줘야 합니다. 수행을 할까 말까 한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생각이거든요. 다음 단계는 당연히 수행하셔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 예외 없이 위대한 변화가 있습니다. 선(禪)이든, (초기 불교) 위파사나든, 가톨릭 피정이든 모든 수행은 우리를 위대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수행이란 대단한 경지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데,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위대합니다. 그렇게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학대하고 왜곡하는 대신 당신의 위대한 본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강옥 교수의 ‘깨어남의 시간들’ 중에서]
―”나는 남을 가르치거나 이끌어 갈 위인이 못 되니, 교수보다 촬영기사로 불리는 것이 더 즐겁고 떳떳하다. 가르치는 자리는 부끄러워 힘들고, 배우러 가는 길은 마냥 당당하여 즐겁다.“
―”현봉 스님이 등지고 있는 벽에 ‘사’(思) 한 글자가 생뚱맞게 덩그러니 붙어 있다. 농사짓는 사람이 밭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스님이 설명한다.“
―”(고우) 큰스님이 법문하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좀 놀랐다. 큰스님은 시종 미소를 머금으시고 때로는 파안대소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스스로 행복하시기에 자연스레 신도들에게 웃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웃음을 지으면서 중도(中道)를 가르쳐주고 중도에 따라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