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10월3일자 팔면봉 첫회. 하몽 이상협이 집필을 맡았다.

“恐喝(공갈), 詐欺(사기), 橫領(횡령), 文書僞造(문서위조) 等(등)을 專門(전문)으로 하는 者(자)가, 副業(부업)으로는, 釜山警察署(부산경찰서) 保安係(보안계) 主任(주임)질을 하엿다나.”

1924년 10월 3일 자 조선일보 1면 구석에 새로운 제목의 고정란이 하나 생겼다. ‘팔면봉(八面鋒)’의 탄생이었다. 그날 중요한 뉴스 몇 개를 골라 아주 짧은 문장의 촌평(寸評)을 통해 권력과 사회에 따끔한 비판을 가하는 이 코너는 첫 회부터 부패한 일제 경찰을 때리며 펜을 통한 항일을 하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팔면봉’이 3일 100년을 맞는다. 한마디로 ‘촌철살인(寸鐵殺人·짧은 말이나 글로 급소를 찌르거나 감동시킴)’의 한 세기였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한국 언론사에서 100년을 내려오는 고정물은 매우 드물다”며 “제목만큼 매서운 방망이로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재미와 영향력이 장수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정인성

◇전 방면 뉴스에 대한 ‘촌철살인’

‘팔면봉’이란 제목은, 옛 지식인 사이에서 ‘세상사 여러 분야에 관해 솜씨 있게 펴낸 글’이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팔면’은 동양 사상에서 ‘모든 방면’을 뜻하고, ‘봉’이란 ‘힘 있는 글’을 뜻하는 ‘필봉(筆鋒)’의 준말이다. 모든 방면의 뉴스에 대해 짧은 문장으로 그 의미를 밝힌다는 뜻이다.

팔면봉의 신설은 당시 조선일보의 대대적인 개편과 관련이 있다.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는 1924년 9월 13일 독립운동가 신석우에게 판권이 넘어갔다. 민족 지도자인 이상재가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경영진과 편집진을 개편한 뒤, 조선일보는 ‘조선 민중의 신문’이란 표어를 내세워 10월 3일 자를 면모를 일신한 혁신호로 발행했다. 제호 디자인을 새롭게 만들었고 지면별 기사 배치도 바꾸는 동시에 1면에 팔면봉을 신설했다.

억압받던 식민지 시기에 이런 고정란을 만든 것은, 짧은 독설을 통해 일제 통치에 저항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엄혹한 시기에 매일 1면에 이렇게 가시 돋친 글을 싣고도 무사했을 리가 없었다. 팔면봉 기사는 일제에 의해 네 차례나 압수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한자 파자(破字)하는 등 재치 돋보여

팔면봉이 늘 권력 비판에만 나선 것은 아니었고, 때론 독자인 국민을 계몽하거나 힘을 북돋워 주는 일에도 나섰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조선일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23일 복간호 팔면봉에 “위축되고 침체되고 음울하고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과거의 근성은 송두리째 빼어버리세!”라고 썼다.

한자를 이용해 재미를 주는 글도 있었다. 국회의장 내정설 파문이 일자 “설(舌)로 미리 설(說) 흘리니 설(泄) 되겠군”(1998년 7월 3일)이라 썼는가 하면, 부패방지법 제정을 두고 “법(法)이란 물(水)처럼 가버리는(去) 것”(1998년 6월 26일)이라고 쓰기도 했다.

팔면봉은 한때 짧은 시사 칼럼 형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1952년 6월 19일 자부터 다시 ‘촌평 묶음’으로 정착됐다. 지금은 편집국 정치부·사회부·국제부에서 매일 한 건씩 쓰고 있다. 1981~84년 정치부장으로서 팔면봉을 썼던 김대중 전 조선일보 고문은 “팔면봉은 세 줄 분량 안에서 기사 제목을 뽑듯 압축적으로 써야 하며, 단어 하나로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는 데다 풍자와 해학까지 담아내야 하니 결코 쉬운 글이 아니다”고 했다.

◇91세 일사일언, 68세 만물상

조선일보의 또 다른 장수 고정물로는 문화면의 ‘일사일언(一事一言)’과 오피니언면의 ‘만물상(萬物相)’이 있다. ‘일사일언’은 91년 전인 1933년 처음 지면에 등장한 코너로, 200자 원고지 5매 남짓 분량으로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필진이 일상 속 살아가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68년 전인 1956년 첫 회가 나간 ‘만물상’은 금강산 최고 경승지에서 이름을 따 ‘현대의 천태만상을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