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엽 스님(1896~1971) 입적 후에도 잘못 알려진 소문과 오해가 있어서 문도들 입장에서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스님의 일생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책을 내게 됐습니다.”
최근 일엽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꼭꼭 묻어둔 이야기’(민족사) 출간을 기념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경완 스님(김일엽문화재단 부이사장) 등 일엽 스님 문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은 일엽 스님의 손(孫)상좌(제자의 제자)인 월송 스님(84)이 직접 듣고 겪은 일엽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하고 조민기 작가가 정리한 회고록입니다. 반세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에 관한 ‘소문’과 ‘오해’를 바로잡는다니, 좀 특별하지요?
일엽 스님의 일생은 파란만장, 드라마틱했습니다. 평안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김원주(속명)는 당대의 ‘신여성’이었습니다. 1920년 ‘신여자’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시, 수필, 소설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한 1세대 여성 문인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자유연애와 ‘정조(貞操)는 움직이는 것’이라는 ‘신(新)정조론’을 주장했지요. 자신에게 ‘일엽’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춘원 이광수와도 연인처럼 지냈다는 소문도 있고요. 1918년 18세 연상의 교수와 결혼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고 여러 남성과 연애를 했고 대처승과 결혼도 했었지요. 100년 전 그녀의 이런 행동은 얼마나 센세이션을 일으켰을까요. 그래서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과 더불어 당대의 ‘스캔들 메이커’로 불릴 정도였답니다.
그랬던 김원주는 1933년 돌연 수덕사 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합니다. 일엽 스님이 수덕사의 비구니 암자인 견성암에 오자 먼저 수행하던 스님들은 술렁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인사’가 왔기 때문이죠. 시선도 곱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의연하게 수행에 매진했다지요. 만공 스님도 일엽 스님의 정진 태도를 칭찬했고, 덕분에 견성암에서는 수행 열기가 치열했다고 합니다. 출가 후 마지막으로 1935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일엽 스님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이제 완전히 구제되었습니다. 대자비의 따뜻한 일광에 온몸이 완전히 녹아가옵니다. (만공)스님은 내가 노래와 시와 소설 쓰는 것을 피하라고 하십니다. 스님은 절더러 세상의 신문이나 잡지까지 다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외간 사람도 어울리지 말라고 합니다. 깨끗한 몸 깨끗이 가지옵고저. 깨끗한 마음 깨끗이 가지옵고저.”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일엽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해방과 6·25전쟁도 지난 1960년, 일엽 스님은 출가 후 27년만에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과 ‘청춘을 불사르고’(1962)입니다. ‘청춘을 불사르고’의 서문 ‘이 책을 내는 까닭’을 보면 녹슬지 않은 글솜씨와 수행자의 기개가 느껴집니다. “나는 5대 독자 집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리고 소녀 적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었다. 그야말로 외톨이였다. 게다가 이름마저 일엽(一葉)이다. 나중에 춘원 선생에게 받은 아호까지 일엽이 되었으니 ‘일엽, 일엽 가냘픈 외잎사귀란 말이지’하고 뇌까리게 된 이름이다. 우주적 외로움과 ‘센티’가 담뿍 실린 이름을 가진 존재였다.” 출가 이유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타락이냐, 자살이냐?’의 분기점에서 맘 붙일 데 없이 헤매던 나는 그때 가장 위험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천우신조! 이때 나는 다행히 만사를 해결할 수 있는 불법(佛法)을 만났다.”
일엽 스님은 책에서 ‘B씨’ ‘개종한 C씨’ ‘M’ 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출가 이전 세속에서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에세이로 털어놓았습니다. 물론 편지의 결론은 수행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책들로 일엽 스님은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지요. 수덕사에는 스님을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방문객이 하루 1000명을 넘기도 해서 제자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 했다지요. 사람들은 스님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고 찾아왔지만 일엽 스님은 이들을 대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법문했다지요.
월송 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우리 일엽 노스님을 뵙기 위해 올라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궁금한 건 다른 게 아니야. 춘원 이광수하고 연애하다가 실연해서 입산했는지, 그게 궁금해서 오는 거야. 사람들이 똑 같은 질문을 하니까 우리 스님이 지겹고 귀찮아서 그냥, 그렇다고 했대. 그랬더니 내려가면서 대단한 것이라도 알아낸 양 의기양양하게 그러더래. ‘이제야 인정하네.’” 이광수와의 연애설이 이렇게 굳어졌다는 것이죠.
앞서 ‘소문’과 ‘오해’를 말씀드렸습니다. 제자 스님들은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의 주인공이 일엽 스님이라는 소문과 일본인 오타 세이조와 사이에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소문을 대표적으로 꼽았습니다.
먼저 ‘수덕사의 여승’은 1965년에 나온 가요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속세에 두고 온 임 잊을 길 없어/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이 노래가 히트했지요. 오죽하면 요즘도 ‘수덕사는 비구니 사찰 아니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 노래 때문에 세상의 관심이 쏠리자 일엽 스님은 <’수덕사의 여승’을 듣고>라는 글을 발표했답니다.
“여승(女僧)이라는 것은 수도(修道)하는 여인이라는 말이다. 수도라는 것은 길을 닦는다는 뜻인데, 길은 두 길이 있다. 그 하나는 현실적인 세상살이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이 삶의 바탕이며 생명의 본원인 정신적인 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살이를 하려면 이 두 가지 길을 다 닦아 놓아야 완전한 인간으로 완전한 삶을 이룰 수 있다.(중략) 이러한 가사와 같이 감상적이고 저속한 노래가 인기를 끌어 감명 깊게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를 회복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대중이 많다는 증명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숨겨진 아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일엽 스님 사후에 김태신 혹은 일당 스님이라는 사람이 ‘나는 일본인 오타 세이조와 일엽 스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답니다. 그때는 오타 세이조 역시 세상을 떠난 후였다네요. 그는 책까지 내서 ‘수덕사로 일엽 스님을 찾아왔다가 거절당하고 만공 스님 품 속에서 잠들었다, 수덕여관에서 나혜석을 만나 어머니처럼 따르게 됐다, 화가로 성공해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 스님들은 “김씨의 이야기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월송 스님이 그에게 “저에게 스승님의 손때가 담긴 유품이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해보자”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김태신씨도 2014년 별세했습니다.
평생을 세상의 관심 속에 살았던 일엽 스님은 1971년 1월 28일 입적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이었다고 합니다. 장례는 전국 비구니장으로 치러졌는데, 최초의 전국 비구니장이었다고 합니다. 다비식에는 춘성·청담·대은·서옹·혜암·벽초 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일엽 스님 제자들이 ‘꼭꼭 묻어둔 이야기’를 펴내게 된 것은 “2014년, 일엽 스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해온 일당 스님이 세상을 떠나고, 2015년 일당 스님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환희대(비구니 암자)와 재단을 요구했던 일이 기각되었을 때 월송 스님은 스승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책에 앞서 지난 3월에는 일엽 스님의 저서 3부작인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와 평전 ‘김일엽, 한 여성의 실존적 삶과 불교철학’ 등 4권짜리 ‘김일엽 전집’(김영사)도 출간됐습니다. 제1세대 여성 문인, 신여성에서 수행자로 변신해 정진하다 떠난 일엽 스님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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