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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모스크바 국립도서관에서 연설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3년 가까이 계속돼 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급기야 북한이 러시아 편으로 사실상 참전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씨는 “딸이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무슨 잔치를 벌이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아직도 전화(戰禍)가 멈추지 않는 우크라이나를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푸틴 저 빨갱이 놈”이라고 비난하는 어르신을 볼 때마다 고개가 조금 갸웃거려집니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전체주의자나 제국주의자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은 맞습니다만,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은 기존 러시아의 이미지를 뺀다면 좀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침략 전쟁을 멈추지 않는 푸틴의 사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최근 출간된 우크라이나 출신의 미국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세르히 플로히가 지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점에 있어서 흥미로운 지적을 합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 범위인가?”라는 민족주의적 성찰이 생겨났고, 그 ‘민족주의적 사상가’들로부터 푸틴이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돌프 히틀러가 ‘소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등까지 포함하는 ‘대독일’을 지향했듯, 푸틴도 일종의 ‘대(大)러시아’를 꿈꾸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푸틴에게 감명을 준 그 민족주의적 사상가 중 아주 중요한 인물이 한 명 있었습니다. 소련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한 작가가 1992년 러시아로 돌아와, 소련 해체 이후 새 국경에 의한 ‘러시아 민족의 분열’을 러시아 문제의 본질로 규정하며 이를 비판했다는 겁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이었습니다.

솔제니친? 그렇습니다. ‘수용소 군도’ ‘이반 데시노비치’ ‘암병동’ 등의 작품을 통해 소련의 적색 전체주의를 비판했고 끝내 그 적색 전체주의의 붕괴에 일조했다고 평가되는 인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 동시대 소련 작가로는 드물게 1970~80년대 한국어로도 그 작품이 번역됐던 인물. 국민윤리 교과서에도 해외에 망명한 그 지친 표정의 사진이 실려 반공 전선의 강화에 이바지했던 인물.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기대하고 한국에 초청했더니 권위주의 정권 모두를 비판해 초청자를 애먹였다는 그 인물. 고난들 딛고 세계를 바꾼 인물이자 자유와 저항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 인물.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도대체 그 솔제니친이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로 돌아오기를 전후해, 이번엔 무슨 민족주의 사상을 설파했던 것일까요?

귀국 직전인 1990년에 낸 에세이 ‘러시아 재건: 반성과 잠정적 제안’에서 그는 “소련 내 비(非)슬라브 공화국에서 동슬라부족을 분리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 북부로 구성된 ‘러시아 연방’을 결성할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선 1988년 산문집 ‘붕괴하는 러시아’에선 이런 주장도 했습니다. “레닌 이전에는 결코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던 도네츠의 2개 주와 신러시아의 남부 벨트(멜리토폴-헤르손-오데사)와 크림반도 전체로 과도하게 확장됐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지역을 러시아가 병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말년의 솔제니친은 ‘과거의 제국주의적 사고를 소련 해체 이후의 도전 및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러시아의 계획과 연결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난 1998년 12월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문화상 수상 거부를 밝히는 모스크바 극장 연설 중 두 눈을 감고 있는 솔제니친.

세르히 플로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솔제니친은 강한 러시아 국가를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아우르는 범러시아 제국주의 모델에 기반한 동슬라브 국가로서 러시아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이는 러시아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소련식 사고와 제국식 사고의 어색한 타협이었다. 우크라이나 혈통이 절반 섞인 솔제니친은 소련의 전통에 따라 우크라이나인을 별개의 민족으로 일컬었지만, 제국의 전통에 따라 우크라이나인을 러시아인과 동일한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는 민족 구성과 언어·문화에서 이미 러시아와는 달라진 독자적인 국가”라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인식과 180도 다른 주장입니다. 아주 거칠게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민족과 만주족은 원래 같은 민족이므로 길림·요녕·흑룡강성은 한반도와 통합해서 대(大)한국을 구성해야 한다, 근데 이제 한민족 동포가 많이 사는 산동성 일부를 곁들인’ 같은 주장(실제가 아닌 가상의 주장입니다)과 무엇이 다를까요.

▲2003년 러시아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선일보DB

2009년 5월, 푸틴은 비 오는 날씨에도 모스크바 돈스코이 수도원 묘지에 나타나 데니킨 장군, 작가 이반 시멜레프, 그리고 솔제니친의 무덤에 헌화했습니다. 모두 엇비슷한 주장을 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푸틴은 솔제니친을 “능력 있고 헌신적인 국가주의자”라며 칭송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솔제니친이, 다른 사람도 아닌 솔제니친이 푸틴이 저지른 우크라이나 침략의 사상적 지주가 됐다는 겁니다. 2021년 7월 푸틴이 발표한 장문의 역사 에세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성에 대하여’는 “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하나의 민족, 즉 단일한 전체라고 말한다”라는 주장으로 솔제니친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상징적인 반체제 작가가, 만년이 되자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가까운 사상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더구나 그 작가가 과거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솔제니친은 한국의 어느 유명 작가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그 작가는 분명 끝까지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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