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까 다투지 말자”고 의기투합해 팔짱을 끼고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내년은 이들로부터 시작된 한국 선교 140년. 고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은자의 나라’ 조선에 도착한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선진 지식을 가르친 교사이자, 서구 의술로 병을 고친 인술의 실천자였고, 조선인의 마음속에 독립의식을 심어준 스승이었다. 본지는 한국교회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담임목사) 탐방단과 함께 지난달 27일부터 6일간 140년 전 시작된 선교 역사의 흔적을 따라 미국 동부 지역을 순례했다.

19세기 미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에선 수많은 젊은 기독인들이 해외 선교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이 학교 학생이었던 윌리엄 전킨과 레이놀즈는 언더우드의 연설을 듣고 ‘은자의 나라’ 조선으로 향한다. /이태훈 기자

“제가 한 일을 희생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한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저는 제가 한국에서 사역할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1908년 2월 윌리엄 전킨(1865~1908) 선교사가 선교지 전주에서 풍토병으로 별세할 때 남긴 말을 딸 메리는 이렇게 전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전킨 선교사의 모교인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선선한 바람 아래 햇볕은 따뜻하고, 단풍물이 듬뿍 든 나무들 사이 건물이나 집 앞에는 알록달록한 핼러윈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신학교 도서관 깊숙한 곳에 사료관이 있다. 사서는 레이놀즈(1867~1951) 선교사가 번역한 성서와 당시 선교사들의 서신이 담긴 영인본 책자 등 가지런히 놓인 자료들 사이에서, 전킨의 죽음을 전한 딸의 편지글이 담긴 팸플릿을 들어 보여줬다.

그래픽=양진경
1900년대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교사 윌리엄 전킨 부부의 가족 사진. 전킨 선교사는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고도 죽기까지 조선의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생을 바쳤다. /전킨기념사업회

판사의 손자, 목사의 아들, 훤칠한 키에 맑은 테너로 성가를 부르면 홀리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전킨. 그는 1892년 11월 조선에 도착해 1893년 전주, 1896년 4월부터는 군산을 중심으로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1894년 11월 큰아들 조지, 1899년 1월엔 넷째 아들 시드니가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1903년 4월엔 다섯째 아들 프랜시스가 생후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 아들을 조선에서 모두 풍토병으로 잃어 조선 땅에 묻어야 했던 것이다.

참척(慘慽)의 통한을 가슴에 품고도 전킨 부부 선교사는 1903년 남학생들을 위한 영명학교(현 군산 제일고)를, 1904년 군산 여학교를 세웠다.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돌면 몸을 던져 환자를 돌봤고, 거리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거둬 먹이고 길렀다. 본인도 원체 병약한 체질이라, 남장로교 선교본부가 그의 건강을 걱정해 군산을 떠나 전주 시내 반경 6마일 안에서만 사역하도록 명령했다. 딸은 “그때 군산의 성도들이 아버지가 떠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서고, 서울과 미국으로 전보를 보내 군산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할 만큼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썼다. 전주에서 눈을 감을 때 전킨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갑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고 자신의 목숨까지 조선을 위해 바친 남부 신사,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전킨(1865~1908). /전킨기념사업회

그를 기억하기 위해 전주여학교는 전킨(한국명 전위렴)을 기념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기전(紀全)중·여고’가 됐다. 전킨 별세 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의 이름을 새긴 직경 90㎝의 대형 종을 만들어 태평양 건너 그가 담임하던 전주 서문교회에 보냈다.

서울을 중심으로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 등을 세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직후 호남과 충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전킨은 군산에서 시작해 호남 지역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부모 잃은 아이들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미국 선교 역사에서 ‘7인의 선구자(frontier)’로 불린 남장로교 선교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

남장로교의 본산 유니온 장로교 신학교 도서관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자료도 풍부하게 소장돼 있다. 1891년 10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들어온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신학생 대상의 해외 선교 지원자 모집 집회에서 조선 선교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막 밴더빌트대를 졸업하고 에머리대에 진학한 윤치호(1865~1945)도 함께였다. 이들이 환등기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한 미지의 선교지 조선의 모습이 미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들 중에 유니온신학교의 레이놀즈와 캐머런 존슨, 매코믹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가 있었다. 레이놀즈는 전킨의 친구였다. 곧 이들은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자신들을 조선으로 파송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1927년 미 남장로회 75주년을 기념해 전북 군산의 한 교회에서 제작한 자개 액자 속 조선 선교지도. 호남 지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장로교역사협회 지하 사료관 입구에 걸려 있다. 군산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가 호남과 충청 일대로 복음을 전파한 관문이었다. /이태훈 기자

이들은 북장로교와 감리교가 기반을 다진 평양과 서울, 호주 장로교가 맡은 영남이 아닌 충청 이남과 호남 지방으로 왔다.

유니온신학교를 거쳐 버지니아의대에서 공부한 클레멘트 오언(1867~1909)은 1898년 목포에 도착해 목포와 광주에 진료소를 열고 한센인들을 포함해 환자를 돌봤다. 1909년 오언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뒤엔 로버트 윌슨(1880~1963)과 윌리 포사이드(1873~1918)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이어받았다. 조선인들도 외면한 한센인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해 기독교인이 된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 최흥종(1880~1966)은 훗날 한센병 환자들을 도운 여수 애양원을 세운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했고, 광복 후 혼란기엔 여순 반란사건 당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거뒀으나 6·25 때 끝내 순교한 손양원(1902~1950) 목사가 일했던 곳이다. 유진 벨(1868~1925) 선교사 가문이 4대까지 선교사명을 이어간 곳도 호남 지역이고, 유진 벨의 진외증손인 인요한(미국명 존 린튼) 의원이 ‘순천 사람’으로 태어났다.